배신자에게 기회를 주어야 하나요? I 사도행전 (15:36~41) - 최광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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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광희 목사 I 행복한교회(한국)
배신자에게 기회를 주어야 하나요?
사도행전 15:36~41
어떤 교회가 특별 선교 계획을 세우고 담임목사 B 씨와 부목사 P 씨를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그 선교 사역에는 목사를 보좌하도록 J 전도사도 동행했습니다. 선교 여행에는 힘든 일도 있었고 보람된 일과 놀라운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J 전도사가 자기는 선교를 그만두고 집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교회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고향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B 목사와 P 목사가 설득해봐도 안 되어 J 전도사를 보내고 둘이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후 B 목사와 P 목사가 두 번째 선교지 방문을 계획했습니다. 전에 전도한 사람들의 믿음이 약해지거나 변질하지 않도록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B 목사는 지난번에 중간에 고향으로 가 버린 J 전도사를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아니 선교가 무슨 장난입니까? P 목사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고집을 잘 안 부리던 B 목사가 이번에는 양보하지 않고 J 전도사를 꼭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두 목사는 이 문제로 심히 다투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결국 두 목사가 갈라서서 따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B 목사는 J 전도사를 데리고 가고 P 목사는 다른 사람과 함께 떠나기로 했습니다.
B 목사는 왜 이렇게 J 전도사에게 집착하는 걸까요? 사실 J 전도사와 B 목사는 서로 친척인데 그래서일까요?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하나님의 중요한 일을 방해해도 되는 걸까요?
선교 활동을 하러 갔다가 중간에 혼자 도망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망치는 배신행위입니다. 그런데 배신자에게 기회를 주자는 B 목사의 주장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 번 더 기회를 주면 좋았을 텐데 싸우고 갈라선 P 목사가 좀 심했나요? 서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갈라섰으니 둘이 똑같이 나쁜가요? 저는 그런 배신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여간, 그렇게 갈라선 B 목사와 P 목사의 선교 사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에 한 번 배신했던 J 전도사가 이번에는 성실하게 잘했을까요?
여러분이 벌써 눈치를 챘겠지만, B 목사는 바나바이고 P 목사는 바울(Paul)입니다. 그리고 J 전도사는 요한 즉 마가 요한입니다. 사도행전 13:5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출발할 때 요한을 수행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구브로 섬을 지나서 버가에 도착했을 때 요한은 어머니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사도행전 13:13에는 요한이 왜 돌아갔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도중에 만나 평생 바울과 함께 동역한 사람인데 누가는 요한에 대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바울이 그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갈라선 바울과 바나바는 각각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바나바가 데려간 젊은이 요한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온 실라와 한팀이 되어 떠났고 도중에 누가가 팀에 합류했습니다. 또 디모데도 이 팀에 합류했습니다.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기에 우리가 바울의 행적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나바와 마가 요한은 1차 전도 여행을 했던 구브로 방향으로 갔는데 그 후로는 어디서 어떻게 전도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마가의 행적을 추적해볼 단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골로새서입니다. 여기에는 뜻밖에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로마에 갇혔을 때 거기에 마가가 함께 있다고 합니다(골 4:1). 여기서 마가를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했는데 헬라어 ἀνεψιός(아넵시오스)의 뜻은 사촌입니다.
마가는 베드로가 로마에 전도하러 갈 때 헬라어에 능통하지 못한 베드로를 위해 마가가 통역관으로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로마에 온 마가가 바울과 만나서 이 감옥에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가는 바울에게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둘째, 베드로전서입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베드로전서를 기록했는데 벧전 5:13에 나오는 바벨론은 로마를 뜻하는 암호였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마가 요한을 향해 자기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마가는 바나바와 바울에 이어 베드로에게도 사랑스러운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나바의 선택과 고집은 완전히 성공했습니다.
셋째, 디모데후서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에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인데 거기에 보면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는 마가가 자기에게 유익한 사람, 쓸모있는(εὔχρηστος 유크레스토스) 사람이라고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전에 마가 요한은 쓸모없는 사람이고 선교 사역에 방해만 되는 배신자였습니다. 이 젊은이를 데리고 가자고 하던 바나바와 심히 다투어 갈라섰던 바울은 지금 마가 요한을 향해 쓸모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결과를 보면 바나바가 마가 요한을 감싼다고 욕한 것이 좀 미안해집니다. 당시에는 바나바가 우유부단하고 하나님의 일보다 인정에 끌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바나바가 옳았습니다.
모르긴 해도 바나바는 바울과 갈라선 후에 마가 요한의 재기를 위해 참 많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젊은이 하나를 세우기 위해 전 세계를 전도하는 마음으로 사랑으로 돌보고 양육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바나바의 마음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요한도 느꼈을 것입니다. 자기 하나 세워주려고 바나바 목사님이 부목사인 바울에게 온갖 공격을 다 당한 것을 마가 요한이 왜 몰랐겠습니까?
아마도 마가 요한은 “내 평생소원은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서 바울에게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하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바울이 마가를 유익한 사람, 쓸모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죽은 후에 마가는 바나바와 함께 구브로에 갔습니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었고 바나바, 바울 그리고 마가가 처음으로 전도하러 왔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못된 유대인 마술사 엘루마가 있었지요. 총독 서기오바울이 바울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던 엘루마는 바울의 저주로 즉시 소경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랜 후에 바나바와 마가가 구브로에 오자 엘루마가 유대인들을 선동해서 바나바를 쳐 죽이게 했습니다. 그러자 마가 요한이 바나바의 시신을 수습해서 묻었는데 오늘날 그 자리에 바나바 무덤 교회가 서 있습니다(사진).
선동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유대인들의 못된 특징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며 빌라도 총독을 압박했습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고 루스드라에서는 바울을 돌로 쳐서 쓰러지자 성밖에 내다 바렸습니다(행 16:19~20). 그리고 구브로에서는 바나바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거짓 선동에 휩쓸려 분노한 군중은 아무 죄 없는 사람은 죽이곤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거짓에 선동되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지막으로 마가는 바나바에게 들은 이야기와 베드로에게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서 로마인들을 위한 복음을 기록했는데 그것이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하나님께는 예수님을 소개하는데 4개의 복음서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바나바가 마가 요한을 세우지 않았다면 지금 복음서는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밖에 없을 뻔했어요.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독특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군인들에게 잡혀가시던 그 밤에 모든 제자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막 14:51~52).
그 청년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다른 어디에도 없는 이 이야기를 마가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우리는 이 청년이 마가 요한 자신이었다고 추정합니다. 그렇게 보면 마가는 모든 제자가 달아날 때 유일하게 잡혀가던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입니다. 하지만 겁이 많아서 알몸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랬던 마가 요한이 1차 전도 여행을 따라나섰다가 중간에 배신하고 달아났습니다. 그래놓고는 2차 전도 여행에 또 따라가겠다고 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갈라서게 했습니다.
마가는 의리도 있고 순수한 열정은 있는데 겁이 많고 참을성이 부족합니다. 이런 사람은 좋은 사람이 잘 키우면 꽤 쓸모있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이 속으로 그거 내 이야기인데 하고 생각이 드시나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도 하고 실패하지만 잘 훈련받으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실수하고 실패했으나 다시 기회를 얻은 사람은 성경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否認)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를 예수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었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초창기 예루살렘 전도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3000명, 5000명이 회개하고 그의 가족들이 구원받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배신하고 떠난 마가 요한에게 기회를 주는 바나바의 행동을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사실 바나바에게 특별히 빚진 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인 앞잡이입니다. 또 예수 제자를 체포하려고 다메섹까지 갔습니다. 그러다가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사울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을 만나게 해 준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그 후에 바울이 고향에 가 있을 때 바나바가 안디옥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받았습니다. 그때 바나바는 다소까지 가서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에 와서 바울을 부목사로 삼았습니다.
실수했고 실패했고 배신한 것으로 치면 사도 바울은 마가 요한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마가 요한 때문에 바나바와 싸우고 결국 갈라섰습니다.
세상에는 마가 요한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흔치 않습니다. 저도 바나바 같은 아량이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바울만큼 유능한 것도 아닙니다. 바울처럼 유능하지 못하면 바나바처럼 마음이라도 넓으면 좋을 텐데 저에게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순수하지만 겁이 많은 청년, 헌신을 약속해놓고는 어려우면 배신하고 달아나버리는 마가 요한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바울은 그런 사람은 다시는 상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말이 맞습니다. 선교가 무슨 애들 장난입니까? 그런 사람을 다시 데리고 가자고 고집하는 바나바를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더 큰 그림을 볼 때 바나바가 옳았습니다. 바울이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바나바가 더 잘했습니다. 바나바가 훨씬 더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실수했다고 버리고, 실망시켰다고 버릴 것 같으면 지금 나는 목사는커녕 신자로 남기도 어렵습니다. 저는 천국에 들어갈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수없이 나를 용서하시며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저의 소원, 저의 기도 제목은 이것입니다.
“주님, 나로 바나바를 닮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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