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겜으로 간 야곱 - 창세기 33장 18-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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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영 목사(워싱톤메시야장로교회)
샬롬! 샬롬의 정확한 뜻은 ‘완전하다’ 혹은 ‘온전하다’는 것이죠? 흠이 있거나 깨어져 손상되거나, 모자라 부족한 상태가 아닌, 온전한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신체와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건강’이라는 뜻이 되고, 심리적인 측면에서 사용될 때는 ‘평안’이라는 뜻이 되고, 농사와 관련되어 사용될 때에는 ‘풍작과 풍요’이란 뜻이 되고, 전쟁과 관련하여 사용할 때는 ‘완전한 승리’를 말하고 있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 천년 동안 이런 의미의 ‘샬롬’을 인사말로 사용했고, 예수님도 ‘샬롬’을 인사말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샬롬은 오직 하나님이 주셔야 누릴 수 있는 것이죠? 돈이, 명예가, 성공이 세상이 우리에게 참된 샬롬을 줄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말씀했죠?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17) 여러분에게도 주님이 주시는 샬롬이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샬롬을 누리는 것입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려함이라”(렘29:11)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실수함으로 범죄하고 방황할 때, 우리를 징계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힘들어질 수도 있지만, 징계를 주시는 이유도 샬롬 때문입니다. 징계를 통해서라도 우리가 온전한 삶으로 돌아와 온전한 샬롬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 중에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본심이 사랑이요, 평안이라는 사실을 기억함으로 주님만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은 삼촌라반의 집에서, 온갖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샬롬을 지켜주셨습니다. 밧단아람에서도, 또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는 길에서도 그렇고, 또 얍복강가에서도 그렇고, 그는 죽을 수 있는 큰 위기를 몇 번이나 만났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의 샬롬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야곱은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이제 야곱은 하나님과 약속했던 벧엘로 가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셨던 언약의 장소, 그의 아버지가 거하는 헤브론으로 갔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야곱이 어디로 갔습니까? 본문 17절을 보면, 숙곳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집을 지었다는 말은 그가 오랫동안 그곳에 거주할 의도가 있었다는 의미이죠?
그렇다면, 야곱은 왜 벧엘이나 헤브론으로 가지 않고 여기에 거주할 생각을 했을까요? 성경학자들은, 첫째, 지난 20여 년간 피곤했던 밧단아람에서의 삶을 이곳에서 쉬면서 재충전하기 위함이었다고 하고, 둘째,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 얻은 환도뼈 골절로도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죠? 여러분이 20년 이상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려오다가, 이제는 어느 시점이 되어 휴식을 갖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죠?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는 어떨까요? 17절을 보면, 문제가 보이는데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지금 야곱의 말에는 ‘자기를 위하여’, ‘짐승을 위하여’라는 말만 나오고,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죠?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는데, 하나님을 위해서는 살지 않고, 오직 나와 내 것만을 위해서만 산다면, 어떻겠습니까? 분명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도 이럴 때가 있는데요,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막 살려달라고, 은혜를 달라고, 매달려서 기도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살기보다는 나를 위해 살려 할 때가 더 많죠? 그러나 이것이 영적으로는 문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야곱에게 있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고, 사실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지는 33장 18절 이하를 보면, 이제 그는 세겜으로 가서 땅을 사고 있는데요,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집을 짓는 것보다 더 확실한 정착의 의미가 있죠? 이제 야곱은 아예 세겜에 정착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을 백 크시타에 샀다고 했는데, 1크시타는 새끼 양 한 마리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백 마리 새끼 양을 주고 땅을 샀다는 것입니다. 그럼 얼마나 큰 땅을 산 것입니까?
그런데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얻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운운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죠? 그래서 문제가 터지죠? 34장을 보면, 그의 외동딸 디나가 세겜성을 방문했다가 강간을 당하고, 그로 인해 그 형제들이 세겜 사람을 죽이며,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죠? 그렇다면, 야곱이 제단을 쌓고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했다는 말은 어떤 의미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이용했다는 것이죠?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 고의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죠? 그럼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그의 무지와 연약함에서 비롯된 실수이죠? 우리도 아직은 잘 몰라서, 믿음이 연약해서 저지르는 실수와 허물이 있죠? 이러한 우리의 실수와 허물은, 야곱과 같이 엄청난 하나님의 응답과 은혜를 체험한 후에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계획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이런 실수와 그로 인한 시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때 주변 족속들로부터 죽음의 위기를 느끼게 될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됐는데요, 34장 3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이제는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아주 심각한 위기 가운데 처하게 된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 야곱의 가정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일 우리의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나 35장 1절을 보면, 이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면서, 놀라운 일이 생기는데요, 어떤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이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 하시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죠? 여러분, 진정 우리 성도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돈이, 권력이, 혹은 우연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그레사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되는데요,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하나님만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야곱이 세겜으로 간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 성도의 인생은 아무리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얼마든지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인생이 무지와 연약함으로 인해 실수하고 당하는 시련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일에 하나님이 가만 계실 때가 많음을 보는데요, 왜 그러실까요? 이 부분은 바로 인간이 책임져 할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도, 하나님은 전혀 관여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선택에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그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함으로 안색이 변하여졌을 때도,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그런데 가인이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그의 아우 아벨을 죽였습니다. 누구의 책임입니까? 가인의 책임이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범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우리가 범죄한다면, 그것은 분명 내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도리어 내 책임을 돌아보는 편이 훨씬 더 현명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고난을 허용하실지라도, 결국은 반드시 우리를 건져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같이, 자신과 언약을 맺으신 자기 백성을 반드시 도우시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가인은 저주의 가문의 조상이 되었지만, 부족해도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야곱은 축복의 언약 가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아담으로 인해 온 인류가 직면했던 영원한 형벌의 저주는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를 통해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예수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만 바라보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야곱과 같이 그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저주와 축복의 문제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풀어주셨고, 이에 그 은혜는 오늘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정신 차리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시련을 당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순종함으로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과의 어긋났던 관계를 회복했을 때, 그의 문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도 이곳 하나님의 집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문제가 사라지는 역사를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여러분의 삶이 주님과 멀어졌었다면, 이 시간 다시 회복하시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를 받고도 까먹은 것이 있다면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가운데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더 큰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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