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바라보라 (고전 2:2) - 강신용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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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사랑의동산교회 I 강신용목사
성경에는 많은 사람과 많은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들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만민의 죄가 해결되었고, 구원의 길이 열렸으므로 누구든지 그를 구주로 믿는 자는 구원받는다는 십자가의 교리에 사람들은 의문을 품는다. 그래서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은혜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을 그의 제자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마 16:16)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자기가 곧 죽임을 당할 것과,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때 베드로가 즉시 앞에 나서서 안 된다고 만류했고, 주님은 그를 크게 책망하셨다. 그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십자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니 평범한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를 믿지 않는 자들은 십자가를 오히려 걸림돌로 여긴다(고전 1:18).
오순절 날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의 주제도 십자가였고, 사도 바울 역시 십자가의 놀라운 능력을 전했는데, 그는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도 서슴치 않았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사도들은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만 전하지 않았다. 그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를 전하며 설교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 년 전 사람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다.
걸림돌과 머릿돌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걸림돌이다. 그들은 메시아는 위대한 왕으로 오신다는‘다른 메시아 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근본적으로 십자가를 싫어한다. 십자가는 흉악무도한 죄인들이 형벌을 받는 심판의 도구로 십자가는 정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죄인들 대신 정죄를 받은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에 철학적 사고에 익숙한 헬라인(그리스인)들은 십자가의 교리를 부도덕한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죄를 지었으면 그 죄 값을 내가 받아야 마땅하지 다른 사람이 대신 그 대가를 치른다는 것은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헬라인 타입의 사람들은 어떻게 한 사람이 죽으므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시킬 수 있단 말인가..그것을 무조건 믿으란 말인가..? 예수님은 참으로 훌륭한 도덕군자요, 많은 사람들에게 탁월한 사상과 교훈을 남겨준 훌륭한 인류의 스승이라고 한다면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의 죽음이 나의 죄를 속량한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십자가의 교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걸림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건축자들이 버린 그 걸림돌을 가져다가 머릿돌로 삼아 믿음의 집을 짓는 특이한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탁월한 사상가요 사회제도를 뜯어고치려 했던 개혁자였는데 그를 시기하던 자들에 의해 아깝게도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했다고 말한다.“만일 그분이 오래 살았다면 참으로 좋은 교훈들을 더 많이 남겼을 텐데 그의 죽음은 인류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정체를 모르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대속의 죽음을 죽으러 십자가로 가셨다.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말 것을 제자들이 강력하게 말렸고, 가시면 체포되실 것이라고 극구 반대했지만, 예수님의 결심은 막을 수 없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
예수님은 비로소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제자들에게 밝히셨다. 그것은 만민의 죄를 속죄하는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어놓겠다는 것이었다(마 20:28).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셨지만, 우리의 죄가 그에게 옮겨지므로 잠시 죄인이 되셔야 했고, 성부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셔야 했다. 십자가만이 만민을 구원할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대속의 죽음만이 만민의 죄를 속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십자가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십자가의 형벌을 자청하신 것이다.
도덕적 생활도, 선행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면 절대자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을 전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국법을 위반 하지도 않았고,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한 적도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만한 행동을 한 적도 없고 나름대로 깨끗하게 살았으니 지옥이 있다면 나는 최소한 그곳에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것이 자신을 하나님 께로 데려가지는 못한다. 만일 그러한 삶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실 하등의 이유가 없었을 것이며, 갈보리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좋은 일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사회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소유를 전부 사회에 기부하기도 하고, 외딴 섬이나, 열악한 환경의 시골에 가서 일생을 봉사하기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남을 위해 큰 희생을 치루기도 한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혹은 조국의 근대화, 민주화를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하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도 하고, 영웅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도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는 없다.
종교적 열심도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행위로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깊은 산에 들어가 명상과 기도로 절대자에게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 중 일부는 금식을 하고 금욕으로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하며 고행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목회자는 40 일 금식기도를 몇 번 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 열심이‘자기 의’가 되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공로를 밀어낸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백부장 고넬료는 종교심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경건했고, 구제를 많이 했으며,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신앙 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초청해 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듣도록 인도하셔서 그와 그의 가족들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지 아니하면 구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종교적인 사람은 많다. 특히 유대인들의 종교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옛 언약과 새 언약
선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율법의 언약을 체결할 때 동물의 피를 보증으로 사용했다. 피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피로 보증을 했다는 것은 언약체결에 생명을 보증의 인(印)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동물의 생명인 피를 도장으로 사용하여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만일 계약을 파괴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제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신약시대가 시작되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약 성도들과 새 언약을 준비하셨다.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는 옛 언약을 그리스도로 하여금 다 지켜 완성하게 하신 후,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는 새 언약을 예비해 놓으셨다. 주 예수께 나오는 자마다 값없이 구원받는 은혜의 언약이다. 이 새 언약을 체결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생명)를 보증으로 삼기로 하신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그의 보배로운 피를 새 언약의 도장(印)으로 사용 하셨다. 십자가로 가시기 전 최후의 만찬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잔을 돌리시면서 하신 말씀은 이를 가리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 오직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독점적인 채널이다.
아벨의 피와 그리스도의 피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2장 24절에서 아벨의 피보다 월등한 예수님의 피에 대해 이렇게 진술한다.“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와 그가 뿌리신 피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해줍니다”(표준새번역 개정판). 아벨은 죄 없이 억울하게 카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무엇을 호소했는가?“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창 4:10-11), 아벨의 피는 죄에 대한 심판과 저주를 하나님께 호소했고, 하나님은 살인자 카인을 심판하셨으며, 그가 사는 땅을 저주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께 무엇을 호소했기에 아벨의 피보다 월등하다고 증언한 것일까?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와 달리 죄에 대한 용서와 속량(贖良)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호소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는 아벨의 피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아버지여, 죄에 대한 심판으로 저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제가 대신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을 믿는 자들의 죄를 모두 사해주시고, 저의 의를 전가시키셔서 영생을 얻게 하옵소서.”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한 내용이다.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의 호소를 들으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들의 죄를 모두 용서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주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죄에 대한 심판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그리스도 예수,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셔서 온 인류 가운데서 오직 유일하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피로 구성된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0장 22절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표준새번역 개정판).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는 것뿐이다. 주 예수를 믿어 성령으로 인 쳐진 성도는 새 언약 백성이며, 예수의 피가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했으므로 더 이상 자신을 죄로 더럽히지 말고 빛 가운데 행하며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이다.
십자가를 바라보라
하나님은 죄를 눈감아주실 수 없는 분이다. 죄에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라. 창세기 3장에서부터 죄가 인간 사회에 들어왔고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셨다. 노아 시대도 홍수로 죄를 심판하셨고, 소돔성의 멸망도 죄에 대한 심판이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할 때에도 죄에 대한 심판으로 출애굽 1세대들은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가나안 정착 후에도 이방인의 우상을 섬기는 죄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고, 구약성경 전체를 보면 죄와 벌이 반복되는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죄는 우리에게 육적인 죽음 뿐 아니라 영적 죽음을 가져온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죄 없는 사람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징벌을 대신 받는 길밖에 없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들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씨가 아니라 성령의 씨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다. 원죄가 없는 그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징벌을 받게 하셨다. 이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방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잘못 전한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남기신 말씀을 잘 배워서 그 교훈을 지키며 사십시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모범이 되고 선한 영향을 끼쳐 빛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믿음의 삶이며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런 식으로 설교하지 않았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 양 예수를 전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속량의 은총을 믿는 것이 먼저인 이유는 십자가 없는 교훈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인도의 영웅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가 주님의 산상수훈에 반해서 그것을 붙잡고 살았지만, 그에게는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인생을 살다 갔다. 먼저 십자가를 믿어 구원받은 성도에게 율법이 필요하고, 도덕적인 교훈이 필요한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가 빠지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를 바라보라! 주님은 만왕의 왕이신 제 2위격이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인간으로 성육신하여 아기 예수로 오셨다. 죄와 사망의 늪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우주 최대의 러브 스토리다. 이를 깨달은 바울은 자기의 자랑꺼리는 오직 십자가밖에 없다고 고백했다(갈 6:14). 그는 지식, 신분, 학벌, 명예..등 세상적으로 보면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음눈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본 후 자기의 자랑꺼리는 참으로 하잘 것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만이 자기의 자랑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성령을 통해 지식적으로, 그리고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근본이요, 영생을 얻는 길이다.(요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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