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구원의 하나님”-(5) 중국 학교사역에서 영국선교사로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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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애 목사(강남임마누엘교회 담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중국에서 5년간의 사역을 접어야하는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내가 근무하는 중.고등학교는 제법 큰 학교로 전교생이 한국 학생 포함 1천명이 넘는 학교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교육국에서 실사가 나왔다. 교장선생님은 다급한 목소리로 나에게 빨리 어디든 숨으라고 하셨다. 영문도 모르는 나는 순간 그러잖아도 낮 근무 후에 밤이면 밤마다 중국신학생들과 접촉하면서 알게 모르게 위협감을 느끼고 있었던 찰나였다. 저녁이면 조선족 한족 신학생들이 우리 집에 와서 학교졸업하면 북한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간접적으로 나에게 한국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고 학교일도 바쁘지만 학교근무 후 중국신학교 신학생들과 교제가 더 분주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친분이 있었던 강 교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프로데오 선교합창단을 이끌고 북경 BMW극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여러 많은 사역들이 연결되어, 어디 관광하나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했다. 바쁜 사역가운데 나는 평소에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가, 난 계속 중국에 남아서 북한사역을 준비해야 해야하나보다, 이렇게 마음먹고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보고 피하고 숨으라 한다.
나는 학교 안에 작은 창고에 뛰어 들어가 숨었다. 빗자루, 쓰레받기, 걸레들이 쌓여진 곳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작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며 그동안 움직였던 일들과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기도반 푸념반 “주님 공산국가가 이런 곳인가요? 아니면 제가 중국학교 총책임자 위주런 선생님과 (나는 한국학교 총책임자로 둘이서 함께 학교 중요한 회의에 참석했다) 중국 몇몇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오늘 문제가 된 것 인가요? (당시 학교 내에서 복음전파 활동 금지) 아니면 중국신학생들과 중국 공산당 장애인 학교에 복음을 전한 것이 교육국에 잘못 전달된 것인가요? 아니면 쿤밍 사대부중에 잠깐 있을 때 북경학교에서나 아이들에게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이 생명이요 부활이요 산 소망이라는 복음을 전한 것이 오늘 발각된 것인가요?
나는 혼자서 급하게 들고 나온 강의 자료를 가슴에 움켜쥐고 기도 아닌 기도를 드리면서 갇혀있었다. 순간 중국 공안의 그 무섭던 눈초리가 떠오르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머리에 수많은 사연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중국 학교는 한국 학교와는 시스템이 달라서 교장 교감 선생님들마저도 중앙정부에서 통제 감시하는 시스템이었다. 한국 학교 교장선생님과 사모님은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좁은 창고 문틈으로 보았다. 중국 공산당 교육국 직원들이 학교 정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이제 중국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어둡고 비좁은 창고를 나와 살금살금 학교정문을 벗어나 택시에 몸을 실었다. 베이징 한여름 거리는 내리쬐는 태양이 너무나 뜨거웠고 그 속에 매연 스모그 현상으로 괴로웠다. 나는 택시 뒤에 앉자마자 두 손 두발을 하늘로 치켜들고 한국말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너무나 절박한 순간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이제 중국 사역을 그만둬야 하나요? 그럼 저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요? 그리고 어디로 사역을 떠나야 하나요? 두 딸 학교는 어찌해야하나요? 우리 학교는 어떻게 되나요?” 두 손 두발을 들고 큰소리 기도하는 나에게 운전기사가 뒤를 획 돌아보면서 놀란 듯 큰소리로 “와이 삼마?” 십 수 년이 지났어도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목소리다. 이상한 외국여자가 무슨 말을 하나? 아니면 미친 거 아니야?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봐도 내 모습이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하고 또다시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나에게 너무나 선명하게 주님께서 보여주셨다. 많은 나라 국기들이 내 눈앞에 쭉 내려오는데 맨 위에 영국 국기가 가장 크게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영국으로 가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나는 순간 물었다. “주님, 그럼 제가 중국을 떠나 영국으로 가는 중거를 보여주세요! 그리고 영국은 기독교 발생 국가이고, 나는 가난하고 영국은 부자나라인데 영국으로 가라니요?” 이 순간에도 내 형편을 보면서 인간적인 계산이 앞섰다. 그렇지만 얼마나 간절했던지 두 손 두발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튀어 나왔다. 운전기사가 볼 때는 ‘저 한궈룬(한국) 여자는 누군가 함께 중얼거리고 있어’ 운전기사는 얼굴이 찡그려져 있었다. 얼굴표정이 포기하고 단념한 듯 우리 집 주소를 향해 가끔 신호등을 무시하면서 정신없이 달렸다.
우리 집에는 학교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를 붙여주셨는데, 집에 도착하자 나는 그날따라 집에 도착하자마자 여권을 확인하였다. 여권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한국여권은 중국이나 북한사람이 위조하기에 좋았고 팔아도 큰 값을 주었다. 가끔 북한 사람도 우리 집에 드나들었기에 별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택시 안에서 증거를 보여 달라고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인가? 여권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 건가?
아주머니를 불렀다. 우리 두 딸 것은 있는데 내 것만 없어진 것이다, 아주머니는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절망스러운 모습이었던지, 어찌된 일인지 그 이튿날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 보니까 여권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도 없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나를 도울 이는 하나님밖에 없었다. 중국에서 수많은 주의 일하심과 인도하심을 보았던 것이 그저 감사했고 오늘 이렇게 사역을 접고 또 다른 사역지를 향해 간다는 것 그 자체로 무조건 감사했다. 사라졌던 여권이 하루아침에 그 자리에 와 있는 것 또한 기적이 아닌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들도 있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말로만 듣던 북한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중국 신학생들의 순수한 복음의 열정과 그리고 두 딸의 착하고 순종적인 모습에 이런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나는 교장선생님께 자초지종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학교를 그만두고 사랑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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