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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2)

“내가 만난 구원의 하나님”- (4) 남편과의 만남 그리고 사역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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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카이로스타임즈
댓글 0건 작성일 23-08-1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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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영애 목사(강남임마누엘교회 담임)

 

네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편 42:5).

 

주님은 내게 영적으로 바로 서기를 바라셨다. 모든 환경이 순탄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씀을 읽고 들었고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스치는 바람에도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하나님 앞에 사는 삶 을 살기위해 나 자신을 순간순간마다 십자가에 내려놓았다. 이모네 집에서 나와 큰오빠네 집으로 들어가 대학입시준비를 했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이 있던 나는 법대의 꿈을 접고 미대로 진로를 선택했다. 이때 미술과외 선생님이 남편이 되었다. 군대 제대 후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3학년에 복학한 남편은 모든 면에서 세상물정 모르는 순수한 소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쌓아가면서 서로를 격려하며 관계가 깊어 갔다.

 

남편은 우리 집 계단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렸다가 소년처럼 해맑게 나를 반겼다. 나날이 사랑의 수위가 깊어가고 만날 때마다 장미꽃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을 하자고 고백했다. 둘 다 학생의 신분으로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결혼조건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조건으로 결혼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일주일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1주일도 채 되기 전에 3일이 지난 후 남편은 대형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같이 신앙생활 하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 앞에 고백하고 그 이듬해에 학생신분으로 약혼식과 결혼식을 올렸다. 준비도 되지도 않은 순수한 청춘 남녀 어떻게 보면 무모한 결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용기 있고 결단력 있는 멋진 젊은이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큰애가 태어나고 둘이서 입시학원을 10년 이상 경영하면서 주님은 우리를 복음의 사명자로 부르시는 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 남편은 한세대 대학원으로 신학과에 입학을 했고 결혼 때문에 나는 그만뒀던 학업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나 역시 신학을 공부했다. 남편은 대학원 학생시절부터 전도사로 성실하게 사역을 했다. 소년 같은 남편은 늘 언제나 꿈 많은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주변에 고향 술친구들이 밖으로 불러내서 힘든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왜냐하면 거절하지 못하는 착한 남편, 이런 남편을 이해주지 못하고 화를 냈던 나의 모습. 지금 돌이켜보면 아내로서 사모로서 좀 더 잘해주지 못한 게 아쉽다.

 

남편은 오랫동안 앓았던 폐병으로 결혼 20년이 넘는 해에 먼저 의리 없이 소천 하였다. 그때 신학동기 목사님들은 가끔 만나면 이렇게 말했다. “사모님 목사님이 못다 한 사역을 목사님 몫으로 두 배나 하셔야 합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늘 아쉽고 잘 더 섬기 못한 애잔한 슬픔이 있다. 남편이 더 육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어려운 이웃에 빚보증을 서준 것 때문에 스트레스가 한몫 더했다. 남편이 아플 때 빚에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믿음이 없었다면 몇 번이나 다 버리고 욥의 아내처럼 도망쳤을 것이다. 그래도 끝내 감사한 것은 믿음으로 버티고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고난의 강을 넘고 넘어 지금 담임목사로서 남편이 못다 한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 다하지 못하는 우여곡절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실수하고 연약하고 쓰러질 때마다 마태복음 633장 말씀을 부여잡고 힘겹게 지탱해 나갔다.

나는 그간의 학원원장으로서의 경력을 인정받아 신학교에서 교수로 임명을 받았다. 총신대 대학원장이셨던 신성종 박사님과 함께 학교에서 일하면서 신 박사님께서 어느 날 나에게 말씀하셨다, “노교수님 책을 쓰세요. 그래야 사역에 탄력이 붙어요.” 그 말에 힘입어 주님 앞에 기도하고 나온 책이 한국 저출산을 대비해 영합본 성경태교동화책이다. 거의 10년 넘게 준비해서 나온 책이다. 나는 이때 앞으로 우리나라에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출산 문제를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을 방문하시는 목사님들이나 교수님들에게 말하면, 사람들이 이상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신학교에서 중국 선교사로 갈 교수를 찾았고 중국 국제학교 교사를 구하는 학교책임자를 만나면서 내가 적임자라는 것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나셨다. 두 딸을 데리고 중국 국제 학교 교사 겸 선교사로 중국을 향했다. 쿤밍 사범대학교 교사로 북경 칭훤푸중 교사로 사역이 시작되었다. 큔밍 국제학교에서 놀라운 사간은 10년 넘게 몽유병으로 괴로워하던 학생환자를 예수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또 북경에서는 학생들을 데리고 중국 간부 자녀들이 다니는 장애학원에 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면서 복음의 길을 여는데 부족한 나를 사용한 것이다 .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중국 학교에 재학하는 한국학생들을 데리고 봉사활동을 해라고 하셨다. 나는 수소문 끝에 학교에서 가까운 인지도 있는 학원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기로 했다. 사전 답사 차원으로 나를 포함 중국교사 한 명과 두 명의 학생들을 데리l고 원장을 만나러 갔다. 그 곳은 모택동의 장애인 아들을 위해 세운 일종의 대안학교였다. 전통적으로 중국 고급 간부 자녀 중 지체부자유 자녀들만 다니는 나름 명문학교였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각 나라, 미국 영국 캐나다... 등 많은 봉사단체가 다녀간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안내원이 원장님은 고위직에서 은퇴한 분이라고 안내했다.

 

원장이 있는 방에 들어가니 불손한 자세와 불친절한 어조로 왜 봉사활동을 하려느냐고 다짜고짜 물었다. 당신들도 여기에 와서 봉사활동 했다고 하고 고국에 사진 보내서 도네이션 받으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순간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주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 내심 나는 이 모든 일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는 대담했다.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하신 그런 목적이 없습니다. 한국학생들이 여기서 봉사활동 하려는 것은, 중국정부가 한국 학생들이 중국에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고, 그리고 장애어린이들과 우리 학생들이 잠시라도 와서 섬기면서 인류애가 어떤 것인지 서로 교감하고 나누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원장은 공산당 모습으로 냉정했다. “그럼 좋습니다. 단 사진촬영은 일체 금지입니다. 그리고 조건이 있습니다. 한국 수건과 한국과자, 우리가 필요한 한국 노트를 준비해 가지고 오십시오.” 그때만 해도 한국 수건. 과자, 노트는 그들에게 좋은 제품이었다. 나는 일부러 하나는 거절했다. 수건과 과자는 할 수 있지만 한국노트는 할 수 없다. 대신 공연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나의 속내는 찬양을 우리 학생들 40명에게 준비하여 복음을 전할 생각이었다. 원장은 공연이라는 말에 눈치가 비웃음반 찬성반이었다,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하면서 말했는지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번 해보라는 의사 표시를 했다. 우리는 확답을 받고 교장선생님께 보고를 하고 찬양할 학생들을 물색했다. 그중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바이올린 연주자 3학년 여학생, ‘하늘가는 밟은 길이찬송가 첼로 연주자, 전교생은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을 학생들에게 연습시키면서, 그 학교에 복음이 들어가기를 아무도 모르게 간절히 기도했다. 이윽고 연주회 날이 되었다. 학교 측에서 준비한 수건과 과자를 몇 박스 들고 교사들과 학생들과 함께 방문했다. 이내 연주가 시작되었다. 봉사 나온 북경대학생들과 우리학생들 장애아동 거의 150명 넘는 숫자 앞에 원장이 다리를 꼬고 팔장을 끼고 한번 해보라는 식으로 무뚝뚝한 특유의 공산당 간부답게 맨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시끄럽고 아수라장 같은 장내를 바라보면서 나같은 죄인 살리신바이올린 선율이 2분정도 지나자 원장자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장내가 성령님의 임재가 분명히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뒤의 모습으로 강단 안이 고요하고 평화롭기 시작했다. 원장의 팔이 풀어지고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마지막 한국말로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우리학생들의 합창이 끝나자 원장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기립박수를 힘껏 쳤다. 원장은 내게 다가오더니 라오쉬 훤 세세니(선생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은 처음 들었다, 내가 바하 음악을 좋아하는데 이 음악은 처음 듣는 음악인데 바하 음악보다 더 아름답다고 평화롭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음악이다라고 말햇다. 이 음악은 천지를 창조하신 구원의 하나님 본향 천국을 사모하는 찬송가였다. 속으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원장님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한 채 밖에 나가서 단체사진을 찍어도 좋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와 줄 수 없냐고 물었다. 공산주의 사상이 두꺼운 그곳에 복음이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나는 원장님께 말씀드렸다. ”약속대로 우리는 사진을 찍지 않겠다. 다음에 우리보다 더 잘하는 학교를 소개해주겠다.“ 그러나 원장은 직접 나의 손을 잡고 밖으로 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나는 주님께 기도하며 내가 이 학교사역을 마쳐도 지속적으로 사역할 수 있는 중국신학교를 연결해 주었다. 신학교에서 한국어로 찬양을 하고 정규적으로 가서 복음을 알게 모르게 전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모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고 은혜였다. 왜 나를 이곳에 보내셨는지 발걸음마다 증거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학교사역이 마칠 때쯤 하나님은 나를 영국으로 갈 것을 종용하셨다.

 

나는 중국 선교를 떠나기 전 임진각에 가서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를 했었다. 언젠가는 통일이 될 날을 위해 꿈꾸며 남북분단의 현실아래 이웃 나라 선교를 위해 간다는 게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내심 통일 북한선교를 위해 기도했고 꿈꿔왔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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