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구원의 하나님” (2)가족 구원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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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애 목사(강남임마누엘교회 담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사도행전 16:31).
조용한 시골 도란도란 마을마다 한국고유의 전통과 샤머니즘(원시적 종교의 한 형태, 샤먼이 신의 세계나 악령과 조상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적인 교류를 하며 샤먼에 의해 정복. 예언. 병 치료 및 정신적 위안자로 삼고 사는 주술사를 통한 악령이 왕인 사상)과 오랜 유교사상으로 정신적 지주로 대부분 삼고 사는 한적한 시골 마을, 봄이면 진달래가 온 동네를 붉게 물들이고 개울가에 버들강아지 한들한들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내리는 곳. 여름이면 논밭에 푸르른 벼들이 결실을 준비하며 뜨거운 햇빛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을이면 노오란 황금 들녘에 실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겨울이면 하얀 눈꽃송이들로 온 천지가 마을을 포근하게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이곳이 천국처럼 알고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 집에 어른이신 할아버지를 통해 병이라는 어둡고 침울한 일이 생겼다. 어떻게 해도 불치병처럼 그 당시 중풍병은 저주였다. 별짓을 다해 봤지만 할아버지 지병은 의원이 쓸데없는 병이었다. 할아버지는 한때 한의사로 일도 하셨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영원히 행복할 것 같은 행복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유지될 거 같은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쩌면 이 사건을 통해 우리 가정은 더 큰 하나님의 나라, 나아가 천국의 백성이 되는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런 우울한 집안의 분위기를 달래기 위해 할아버지는 밤이면 어색한 손동작으로 피리를 부셨다. 아버지는 오랜 세월 군인으로 또한 6.25참전 용사로 잠시 경찰에서 일을 하시다가 나이가 들자 본격으로 농사일에 전념하셨다. 아버지는 멋쟁이셨다. 시내 나가실 때 차림은 농사일 하는 사람답지 않게 여느 장군처럼 갖추고 다니셨다. 어린 내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멋쟁이 모델이셨다. 1970년대에 시골에서 가죽점퍼에 가죽 롱부츠에 머리는 짧게 하시고 기름으로 깨끗이 마무리하셨다. 아버지랑 함께 신작로를 걷다가 버스 정류장이 아니어도 손을 들면 버스가 서고 기사 아저씨는 무슨 유명한 공직자 대하듯 아버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아버지는 이런 멋쟁이 외모에 비해 과묵하셨다.
그러나 나라의 소중함을 늘 말씀하셨다. 자유 대한민국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두 눈에 불이 번쩍번쩍 빛나는 영락없는 멋진 군인의 모습이셨다. 나는 이런 아버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볼 때마다 아버지가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난 나중에 커서 아버지처럼 훌륭한 군인이 되어 이 나라를 지키고 싶어요” 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멋있는 군인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내 말씀드린 내 말에 아버지는 갑자기 화를 내시면서 여자는 군인이 되면 안 된다고 하셨다. 왜 그러셨는지 가끔 이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나이가 들면서 일부 알게 되었다.
우리는 4대가 함께 사는 일하시는 분들 포함 16명이 사는 대가족이었다. 밥상이 항상 때마다 세 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헌신이 얼마나 귀했는지 생각해본다. 또한 우리 집 장롱의 이불들은 칼같이 날마다 정리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져 있으면 아버지의 불호령이 가족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나의 손을 꼭 잡고 시간이 날 때마다 불쌍한 사람들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훗날 대학교 진학 때쯤 군인이 되겠다고 육사를 지원하려는 나에게 아버지는 군인이 되면 호적을 파버리겠다고 다시 으름장을 놓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그만큼 오랜 전쟁터에서 겪은 고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사랑하는 딸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셨다.
아버지는 당신이 꿈꾸던 삶에서 벗어난 듯한 생활에서 가끔 외로워하셨다. 효자인 아버지는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자 술과 여자로 방탕을 길을 걷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자주 어머니와 다투셨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분노가 되어 맹공격으로 아버지에게 원한으로 쏟아 부어졌다. 아버지는 오히려 어머니를 집안에 일하는 젊은 아저씨들과 바람난 의처증으로 집안을 괴롭혔다. 어머니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아저씨들과 몸이 부셔져라 일한 게 전부였다. 집안은 점점 그렇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어린 나에게 집안의 문제는 슬픔 그 자체였다. 이런 집안의 분위기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린 자녀들은 아무 대책도 없는 길거리에 이름 없는 잡초 풀처럼 살아있으나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이는 듯 했다.
그런 사이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일이었다. 나는 그때 어른들이 말하는 한이 무엇인지 어린 나이에 몸소 배웠다. 나는 슬픔을 가누지 못해 한없이 엄마 품에 안겨서 울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 주님을 만났다. 창조주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죄를 대속하기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심판의 메시야 주 하나님, 믿는 자녀들을 변함없이 중보하시고 돌보시는 성령님, 나는 이 복음을 할머니, 어머니에게 먼저 전했다. 그냥 입으로 전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전했다. 울면서 얼마나 이 복음을 전했는지 할머니, 어머니가 항거하거나 변명할 틈이 없었다.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복음을 전했던지 지금 돌이켜보면 곧 재림의 주가 오실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하여 산너머 교회에 다니시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덩달아 교회에 출석하셨다.
교회 그 존재 자체도 모르던 우리 집, 평생에 조상 대대로 교회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우리 집안에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묻은 십자가 복음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건 아버지는 늘 찬송을 부르셨다. 349장 “나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하시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날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아버지는 교회 맨 앞자리에 앉아서 이 찬송을 부르시며 회개하시면서 우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낮고 낮은 곳에 섬김의 종으로 오신 주님.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에서 벗어나 서서히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계셨다.
시골의 수요예배는 저녁예배였다. 예배가 끝나면 앞뒤가 보이지 않는 캄캄 밤이었다. 아버지는 성도들의 맨 앞에 서서 손전등으로 불빛을 비추며 찬송을 부르며 인도하셨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동네 성도들이 아버지의 찬송가 선창에 맞춰 칠흙 같은 어두운 뚝방에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그 길을 작은 불빛과 찬양에 의지하여 그렇게 걷고 있었다. 이제 소녀가 된 나도 그 불빛을 따라 맨 뒤에서 모진 풍상을 겪어낸 어머니와 함께 찬양을 부르며 종종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인생의 많은 사연들을 주님과 함께 동고동락 하시다가 그 모습 그대로 천국에 입성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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