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河 에세이(10) I 비움(KENOSIS)의 미학(美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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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록 목사(선교사, 수필가)
케노시스(Kenosis)란 헬라어로서 “비움”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삶은 케노시스 그 자체였다.
우리 심령이 비워있지 않는 한 천국의 속성을 누릴 수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여기서 “가난함”이란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영혼의 궁핍함과 갈급한 진공 상태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유일한 푯대요 나아갈 방향이다. 우리는 이 예수를 배우고 따르기 위해 매일 기도하며 말씀을 보고 예배에 참여한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왜 주님을 닮아가지 못하고 있는가? 케노시스 영성이 없기 때문이다. 오물이 담긴 컵에는 아무리 생수를 부어도 소용이 없다. 모든 현상은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본질에서 이탈하면 그릇된 결과를 유발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큰 과업보다는 우리 자신들을 보고 계신다. 비움의 영성, 이것이야말로 인간행복의 시발점이다.
1. 케노시스(Kenosis) 의미
케노시스 사상은 성육신(成肉身) 이론의 핵심이다. 케노시스(Kenosis)란 “비움, 소모”를 의미하는 헬라어이다. 비움이란 헬라어 “케노우(κενοω)”에서 나왔다. 케노시스의 원형(原型)은 하나님이 모든 특권을 포기하시고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빌2:7)하심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비움의 극치를 이루셨다.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no reputation, himself nothing)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2:7-8)고 언급했다. 이렇게 케노시스적 화신(化身)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마침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막10:45)로 내어주셨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비하(卑下)는 승귀(昇貴)를 가져왔다 (빌2:9-11). 이렇게 비움의 철학은 위대하다.
2. 비움에 대한 일반원리
공간(空間)이라는 단어의 한자만 보아도 “비움”이 들어 있다. 실제적 표현을 시도하는 미니멀리즘 디자인(Minimalism Design)을 토대로 한 인테리어(Interior)는 더 작게 더 간결하게를 모토(Motto)로 한다. 즉, 비움으로써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동양의 미학과도 일맥상통한다. 단순함과 간결함 더구나 공간을 최대한 확보함으로서 현대인에게 쾌적함을 제공한다. 속이 빈 대나무피리와 바이올린은 공명(共鳴)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생도의 아내가 빌린 그릇, 가나 혼인잔치의 항아리 등이 쓰임 받기 위해서는 깨끗하게 비워있어야 했다. 이렇게 비어 있다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이다. 빽빽한 도시를 벗어나 하늘과 땅이 맞닿는 빈 공간으로 주행해보라. 유쾌, 상쾌, 통쾌하지 않는가?
3. 탐욕을 따라가는 인간의 실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신자든 불신자든 현대병은 가득 채움에서 시작된다. 과욕, 과식, 과로가 대표적이다. 활화산 같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것은 더 높이, 더 많이, 더 크게 뭔가를 채우기 위해 무한 경쟁을 한다. 이런 세상에 살다보니 현대인은 저녁노을을 쳐다볼 여유가 없다. 계절 변화에 따른 대자연의 신비로움도 와 닿지 않는다. 이렇듯 채움을 향한 목적지향적인 인생살이는 피곤하다. 부자유하다. 여유가 없다. 낭만도 없다. 필요에 의해 물건을 가졌건만, 때로는 그 소유물에 종이 된 채 마음과 시간과 정력을 뺏기며 산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형이하학적 물질 때문에 얼마나 많이 번민하며 고통 속에 스트레스를 받는가?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인간의 실존은 부끄러운 일이다.
4. 세상에 밟히는 그리스도인
“저는 예수님을 좋아하지만 기독교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과 너무나 딴판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간디(Gandhi)가 한 말이다. 목사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적 환경 속에서 자란 니체(Nietzsche)는 왜 무신론자가 되었는가? 저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은 비움이 아닌 탐욕의 꼴사나운 모습으로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지금 교회가 동네북처럼 얻어맞으며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아이러니한 시대가 된 것이다.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번영신학의 영향이 크다. 그것은 비움이 아니라 채움이요, 낮아짐이 아니라 높아짐이요, 희생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유의 신앙인에게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
5. 복된 인생, 빛나는 삶의 방안
중국의 철인 장자(莊子)는 허실생백(虛室生白)을 주장했다. 텅 빈 방에 햇빛이 밝게 비치듯 마음을 비우면 밝음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는 뜻이다. 공간과 마음은 같은 이치이다. 예수님은 시종일관 자기 비움에서 그 생애를 영위했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도 하늘의 신령한 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심령을 비워야 한다. 우리 영혼에 덕지덕지 붙은 떼가 얼마나 많은가? 진정 참회자로서 주님의 보혈을 의지할 때(요일1:7) 우리는 창조의 원형으로서 성화되어 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삶의 자리를 단순하게 배열할 필요가 있다. 요긴한 것도 아닌 물건이나 잡동사니들이 켜켜이 쌓여 소유주를 부자유하게 한다. 인생경주에서 몸도 무거운데 적폐적 요소들을 안고 달릴 수는 없지 않는가? 인생은 어차피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이다.
맺음 말
케노시스 영성이란 비움이다. 부정이다. 낮아짐이다. 빼기이다. 공간(空間)은 우리에게 쾌적함을 제공한다. 여백(餘白)은 동양의 미학과도 일맥상통한다. 채움을 향한 목적지향적인 인생은 그 심령이 메마르기 쉽다. 저들은 자기 소유물의 덫에 걸려 인생을 아름답게 향유하지 못한다. 역사적 인물인 간디나 니체는 왜 기독교인들에게서 실망하였는가? 바로 비움의 실제인 예수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된 인생, 빛나는 삶이되기 위해서는 장자(莊子)가 언급한 허실생백(虛室生白)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실(室)을 비워야 백(白)이 생겨난다. 하여 우리는 늘 십자가에 자아((Εγώ)를 묻어야 한다. 그러면 영혼이 맑게 된다. 자유하게 된다. 그리스도로 충만케 된다. 주님의 영광스런 광체를 발하게 된다. 이것이 비움의 미학이다.
<카이로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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