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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칼럼

기로에 선 우리네 인생 I 노재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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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카이로스타임즈
댓글 0건 작성일 23-10-06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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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화 목사(전 성결대학장사회학/목회학 박사)  

  

우리는 삶 가운데에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우선적으로 부모의 선택은 숙명적이라지만 대학과 직업, 종교, 배우자, 살 곳 등은 우리의 선택권 안에 있다. 세계문화사적으로 볼 때에 중세봉건시대, 계몽사회와 모더니즘사회를 거치면서 모더니즘사회의 부조리의 반성으로 데리다, 라캉, 드뢰쥐 등의 프랑스의 해체주의자들의 사조를 만나 기존의 울타리, , , 감옥 등이 해체되고 해방되면서 다양성이 중심이 된 후기 산업사회인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이다. 우리 인생의 길도 다양하게 발전되어왔다. 더욱이 종교의 선택과 더불어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라는 엄청난 차이를 낳게 된다. 이 시간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잘못된 선택으로 후회한 적은 없는가 되짚어보고도 싶다.

 

19세기 러시아 제정말기 대표작 작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는 많은 기독교적 문학 작품을 통해서 종교와 인간, 사랑과 진리, 참된 삶의 의미에 대하여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의 단편작 두 노인은 러시아 민화를 바탕으로 엮어진 작품으로, 선택의 기로에 선 두 노인의 갈 길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작품 내용은 두 노인인 에핌 타라스이치 세벨레프(에핌)’엘리사 보드로프(엘리사)’가 마을 친구로서 서약한 예루살렘 성지순례의 여정 가운데에서 펼쳐진다.

 

주인공 에핌은 부유한 농부이며, 상당히 가부장적이고 빈틈이 없는 완벽주의자이면서 고리타분하기까지 하고 강직하며 술 담배와 나쁜 말은 하지 않고 존경받고 있다는 사람이다. 그는 두 번이나 마을의 장로로 추대되기도 하고, 대가족으로 두 아들과 손자가 있는 엄한 가정을 거느리고 있으며, 건강하고 60세 정도의 흰 수염을 한 신사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속을 썩이는 경우가 많지만, 아들에게 다 맡기고 소아시아를 거쳐서 800km를 걸어가게 되었다. 가는 도중에 펼쳐진 동네는 다 흉년이 들어있었다. 에핌은 성지에 도착하여 돈도 잃어버리고 엘리사의 환상까지 보면서 엘리사의 짓이라고까지 생각하고 그는 성지순례의 여정을 완주했다.

또한 에핌의 절친 엘리사는 부자도 가난하지도 아니하고 목수일과 벌꿀 양봉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두 아들중 하나는 일자리를 구하러 먼 곳으로 가고 한 아들과 같이 살고 있었다. 그는 다정하고 활기차며, 가끔 술 담배도 하고, 노래도 부르지만, 온순하고 이웃과도 잘 지내고 키가 작은 곱슬곱슬한 머리에 턱수염이 난 대머리로 볼품은 없었다. 엘리사는 벌통이라도 팔아서 여비를 마련하지만, 자기는 항상 죄인이고 영혼이 중요하다고 했다. 엘리사는 가족들에게 다 맡기고, 유쾌한 기분으로 친구를 도우며 무리하지 않고 평화롭게 다녀오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에핌과 함께 순례여정을 떠났다.

 

그러나 엘리사는 순례도중에 에핌을 따라가기가 힘들었고, 목이 말라 작은 오두막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흉년이 든 마을을 통과할 때에 두 노인은 헤어지고 이들의 운명은 나누어졌다. 엘리사는 그 집에 들어서자 이게 웬일인가. 흙더미 위에 누워있는 남자가 물을 요청하였고, 오두막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만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엘리사가 돌아설 때 신음소리가 들리고, 그 안 쪽에서 배가 부르고 무얼 달라는 소리를 지르며 눈을 감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악취가 진동했다. 그녀가 무슨 일이냐? 뭐가 필요한가 본데,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물을 떠올 사람도 없다면서, 아이들은 집밖에서 우리는 안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문지방에 쓰러지면서 병마와 굶주림이 우리를 덮었다고 했다.

 

엘리사는 가방을 풀고 빵을 꺼내어 잘라서 남자아이와 노파에게 두었다. 물을 사람들에게 주고, 젊은 여자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으며, 엘리사는 동네 상점에 나가 먹을 것을 사가지고 와서 가정을 돌봤다. 정신을 좀 차린 남자가 가난과 흉년과 어려운 사정을 얘기했다. 일자리도 없고 노모와 딸이 구걸도 했다고 했다. 더 나쁜 상황은 아내가 풀을 먹고 병에 걸려서 살아갈 방법이 없다고 한탄하고 있었다. 노부모와 자식, 아내, 손주 등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절박한 참상이었다. 엘리사는 옆에서 빵을 구워주고 3일쯤 지나자 아이들이 생기를 되찾고 엘리사를 따라다니며 아내와 노파도 기력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엘리사는 4일 후에 단식을 끝내고 5일 후에 가족과 축일을 지키자마자, 다음날 떠나기로 했으나, 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니 이 가족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걱정을 하였다. 그러자 가지고 있는 여행경비로 부자에게 저당 잡힌 4천평을 되찾아주고, 엘리사는 다음날에 떠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가족의 목초지를 찾아주어야 한다고 고민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가족이 측은하여, 코담배를 피워가면서 동정심이 발동하였다.

 

성지순례중 목이 말라 물 한 컵 얻어 마시러 갔다가 이러한 참상을 본 엘리사는 내 대신 에핌이 주님에게 제사를 드려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하루에 6-80km를 걸어서 집으로 되돌아왔다. 엘리사는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펨의 가족에게도 사실을 얘기해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엘리사가 이렇게 많은 돈을 낭비했냐고 놀라했다.

 

에핌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엘리사가 머물렀다는 동네 아낙에게 엘리사에 관하여 묻자 엘리사의 도움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에핌이 집을 떠난 지 1년이 된 후 돌아오자 아들은 술에 취해있었으며 아들을 꾸지람하자 아들이 반항하여 에핌은 아들을 때렸다.

이 가난한 동네 노인은 엘리사가 아니었다면 죄를 짓고 절망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살려주었고,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려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동물처럼 살다가 인간답게 살게 되었다며, 동네에서도 도와주지 아니했던 우리를 모르는 한 순례자가 도왔다고 감탄하고 신의 축복이 내려졌다고 생각했다.

 

엘리사의 아내는 엘리사가 일찍 돌아온 것을 하나님이 일찍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기뻤다고 했다. 남편이 없으면 집안에 활기가 없고, 나이가 들어 일은 못하지만 우리 집 가장이고 남편이 집에 있으면 집 분위기가 다르고 아들이 반가워하고 아이들도 좋아하고 남편도 좋아하고 소중히 여긴다. 우린 죄를 지었지만 양봉이 잘 되었고, 자작나무 아래에서 양봉을 잘 다루고 있었다. 대머리 위를 벌이 쏘지 않고 윙윙 돌아 다녔다.

 

에핌은 중간에서 어려운 동네를 돕고 돌아온 엘리사에게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바란다니까, 에핌은 잠자코 있다가 내 발은 그곳에 갔지만 내 영혼은 다른 곳에 갔다고 했다. 또한 자네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네. 에핌이 돌아오는 길에 엘리사가 들린 그 집을 애기하자 엘리사가 황급히 말을 막으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네. 그 분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면서 겸손해 하였다.

 

에핌은 한숨을 내쉬면서 하나님께 한 맹서를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주고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두 노인은 정신적 물질적 풍요, 현실적 문제, 그리고 영혼의 문제를 편안하게 들려주는 작품이며, 우리의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

 

두 노인 중에 누가 사랑을 실천했던 선한 사마리아인가?(10:29-37). 과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에 우리는 어느 갈래 길을 택할 것인가? 우리는 비록 사람들이 외견상 평가하기를 완벽하다고, 하지만 가족이 문제투성이며, 정신적 문제보다는 물질적인 문제에 관심이 더 있고,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온 에핌과 같이 비록 악인은 아니지만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 아닌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조금은 부족한 것 같고 정신적인 문제도 없고, 비록 순례의 길은 못 갔지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자기의 생명처럼 구제하고 한 가정을 살린 엘리사와 같은 사랑의 실천자인가?

 

성경 말씀에 복있는 사람과 악인의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시편1:1-6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또한 전도서에서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11:8)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기로에 선 우리네 인생은 잘 선택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에게는 한없는 축복이 임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7-8),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신앙으로 율법을 초월한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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