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河 에세이(2)▮25시를 사는 비범(非凡)한 사람
페이지 정보
본문
송종록(선교사, 수필가)
비범(非凡)한 사람이란 25시를 사는 자이다.
25시란 물리적 시간 체계를 뛰어넘는 꽉 찬 삶을 의미한다.
세상 모든 일에 뭔가 성과를 내려면 세월을 앞질러 가야 한다.
“25시”란 무엇인가? 이 말은 원래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기우(Gheorghiu, C. V.)가 1949년에 발표한 소설 “25시”에서 유래한다. 그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농부 모리츠를 통해 나치스와 볼셰비키의 학정과 현대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여기서 “25시”란 하루 스물네 시 다음의 시간으로서 이미 지나버린 불안과 절망감을 상징한다. 그런데 과거의 돌이킬 수 없는 시간 “25시”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24시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바쁜 삶의 의미로 바뀌어 쓰이고 있다. 비근한 예로 매스컴에 “사건 25시, 추적 25시, 특파원 25시, 연예가 25시” 등이 있다. 이처럼 현대인은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정해진 시간을 누가 더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도 달라진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한결같이 촌음(寸陰)을 아끼며 살았다. 시간은 냉엄하다. 멈춤이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함몰시킨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늘 깨어서 인생을 계수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1. 유한한 인생을 계수하는 법
인생여백구과극(人生如白駒過隙)이란 말이 있다. 그 뜻이란 “인생은 문틈으로 백마가 달리는 모습을 보는 것같이 삽시간에 지나간다"라는 것이다.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The Sun)”지는 인간의 평균수명을 80년으로 잡고 일생동안 항목별로 얼마의 시간을 소비하는지에 대한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80년은 701,280시간이다. 이는 24시간(하루)X365일X80년=700,800시간에 윤달로 인해 20년X24시간=480시간을 더하면 된다. 그중 생리적 욕구인 “수면은 하루 8시간 11분으로서 총 239,000시간이며 약27년에 해당된다. 음식 섭취는 하루 1시간 48분으로서 총 52,560시간=6년이다. 화장실 사용은 하루 54분으로서 26,280시간=3년에 해당된다. 이를 합산하면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생리적 욕구를 위해 총317,840시간(36년)을 소모하게 된다. 이는 인생의45%시간 분량으로서 가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인간이 임으로 가용할 수 있는 년수는 44년=383,440시간(55%) 뿐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리 욕구적 시간은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소요되지만 나머지 시간은 얼마든지 상대적으로 선용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2. 대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탄생된 계기
1849年12月 22일. 러시아 세묘뇨프 광장은 군인들과 많은 구경꾼들로 북적거렸다. 임시로 설치한 사형(死刑)대 위에는 반체제 혐의로 잡혀온 28세의 청년이 다른 동료들과 함께 묶여 있었다. 집행관이 소리쳤다. “사형 전 마지막 5분을 주겠다.” 단 5분! 사형수(死刑囚)는 절망했다. “내 인생이 이제 5분 뒤면 끝이라니, 나는 이 5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처음으로 느끼는 세상의 소중함에 눈물을 흘렸다. “자, 이제 집행을 시작하겠소." 그런데 그 순간 “멈추시오, 형 집행을 멈추시오!”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며 형장(刑場)으로 달려왔다. 사형 대신 유배를 보내라는 황제의 급박한 전갈이었다. 사실 황제는 젊은이들을 처형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혁명놀음”을 하겠다고 설치는 저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처형 쇼를 한 거였다. 이러한 내막을 모른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날 밤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날들을 돌이켜보고 실수와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했던 날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피를 흘리는 듯하다. 이제 내 인생은 바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그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생을 "5분의 연속"이란 각오로 1881년 2월 9일 눈을 감을 때까지 글쓰기에 전념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문호가 이렇게 탄생되었다. 만일 그가 사형수로서의 체험이 없었다면 남은 생애를 25시적 긴장감으로 살지 않았겠고 “죄와 벌”같은 불후의 명작도 없었을 것이다.
3. 이십오시를 살 수 있는 삶의 비결
로마제국 시대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말했다. “인생 자체가 짧다는 생각은 틀렸다. 인생은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짧아지기도 하고 길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생을 유용하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인생을 보면 3종류 삶의 형태가 있다. 세월의 속도에 보조를 맞추어가는 사람, 아예 뒤쳐져 떠밀려 가는 사람, 물리적 시간을 앞질러 가는 사람이다. 대개 역사에 자취를 남긴 위인들은 정해진 시간을 초월하는 밀도 높은 삶을 살았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첫째, 인생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 “내가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목표가 없는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처럼 방황하게 되어 있다. 둘째, 목표를 향한 치밀한 계획이 요구된다. 아무리 인생푯대가 있다 해도 구체적 설계가 없으면 기대치에 접근할 수 없다. 셋째, 의지적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행함 없이 탁상공론(卓上空論)에 사로잡혀 있기만 하면 역사의 진보는 없다. “생각은 신중하게, 결단은 단호하게, 행동은 신속하게” 앞으로 나가야 한다. 넷째, 틈틈이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일에 파묻혀 정신없이 살다보면 때로는 좌표를 잃고 엉뚱한 곳을 향하기도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자기 발자취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맺음 말
인간에게서 25시란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는가? 그것은 숨겨진 시간이다. 미래 지향적 속성이 있다. 즉, 매일 한 시간이 더 필요할 정도로 충실하게 살라는 말이다. 우리는 똑 같은 하루지만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를 가져온다. 성경은 인생이 강건하면 80년이라 했다. 이중 1/3은 잠으로 메꿔진다. 깨어서 활동하는 시간은 3분의 2에 해당된다. 이렇게 보면 인생이 얼마나 짧은가? 생명의 끝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자 앞에서 늘 겸허해야 한다. 그 한 방편은 인생을 계수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제2의 인생을 산 도스토예프스키처럼 25시적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카이로스타임즈>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