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여, 이기려면 싸움에 동참하라 I 최광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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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희 목사 (신학박사)
성도(聖徒)가 무엇인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이기는 자’이다. 성경에서 ‘이기는 자’라는 표현은 개역개정판 성경만 보면 6번 쓰였는데 모두 요한일서와 요한계시록에서만 발견된다. 한편, 헬라어 성경에서 이긴다(νικάω)라는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28회 쓰였는데 그중에 요한일서 6회, 요한계시록 17회로 요한이 23회 사용하고 있다(김추성, 『요한계시록 1-9장』 p.209).
이처럼 성도의 다른 이름이 ‘이기는 자’라면 성도는 반드시 먼저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가 사탄 및 사탄의 지배를 받는 세상 세력과 싸우지 않는다면 이길 기회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성도가 싸움을 포기하거나 세상과 타협하여 진리를 양보한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을지는 모르겠으나 이기는 자는 될 수 없으며 결국 성도의 정체성이 흐려지고 교회는 침체할 것이다.
싸우지 않으면 적을 이길 기회가 사라질 뿐만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망가지게 된다.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준 사람은 다윗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다윗은 초기의 열악한 상황에서는 늘 이기는 자였다. 하지만 그의 인생 중반기에 접어들어 상황이 좋아지자 다윗은 안일해져서 싸움을 회피했다. 그 결과 자기 인생은 물론이고 그의 자녀와 온 가문, 교회와 국가에 큰 재앙을 가져오는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다.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전쟁의 계절이 되었을 때 다윗은 장군과 군사들만 전장에 내보내고 자신은 한가로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 결과 다윗은 간음하고(4절) 전투 중인 장수를 소환하여 전쟁을 방해하고(6절) 살인교사까지(15절) 저질렀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고 여유를 부리면 죄짓기에 십상임을 잘 보여준다. 이것을 보면 사람이 한가롭고 여유로운 것은 반드시 복이 아니며, 싸울 일이 끝이 없는 것도 반드시 화(禍)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성도가 적과 치열하게 싸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데 짝하지 않는 것이다. 악인과 친구로 지내는 것은 싸움을 포기한 것이며 국가적인 재앙을 초래하는 것임을 잘 보여준 사람은 유다의 왕 여호사밧이다. 여호사밧(יְהוֹשָׁפָט)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셨다’라는 엄숙한 의미인데 그 이름에 걸맞게 그는 유다에서도 흔히 않은 경건한 왕이었다. 하지만 여호사밧에게 한 가지 치명적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악인을 가까이하는 것이었다. 남북 이스라엘을 통틀어 가장 악한 왕 중 하나가 아합인데 여호사밧은 그런 아합과 친하게 지내며 심지어 사돈 관계를 맺었다. 그 결과로 여호사밧의 아들과 손자 대에는 왕의 씨가 마를 뻔한 사건이 발생했다. 만일 그 당시에 여호와께서 초자연적으로 섭리하지 않으셨다면, 또 여호야다 대제사장이 목숨 걸고 헌신하지 않았다면 메시아가 올 아브라함-다윗의 계보가 끊어질 뻔하였다. 북이스라엘 왕국, 그중에서도 아합왕은 서로 연합하고 협력할 형제가 아니라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할 원수였을 뿐이다.
오늘날도 한국교회에는 우리와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듯하나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많은 목사와 성도들은 그런 자를 구분하자고 하면 오히려 화합을 깨는 분리주의자로 여긴다. 반성경적인 문제가 있는 개인과 사상, 단체를 밝혀 보여주면 오히려 아무나 다 이단이라고 하느냐며 비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하지만 교회사(敎會史)를 돌아볼 때 한국교회는 성경을 거역하는 자유주의자를 구별하고 축출했기에 지금과 같은 부흥을 이룰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는 성경이 완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자와 진화론이라는 미신(迷信)을 옹호하기 위해 성경 파괴를 일삼는 유신 진화론자, 그리고 성경보다 자신의 체험을 더 우위에 두며 체험을 교리로 삼는 온갖 신비주의자가 득실댄다. 그런 자들은 부둥켜안고 함께 가야 할 우리 형제들이 아니라 사도들이 그랬듯 경계할 악인들일 뿐이다. 초대교회 시대에 진리를 오염시키던 헬라의 철학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자유주의와 신비주의라는 양대 원수가 되어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 그들과 싸워야 한다.
구약 시대에는 다윗이나 여호사밧처럼 왕이 나서서 적과 싸워야 했으나 신약 시대에는 성도 한 명, 한 명이 모두 영적 전투에 앞장서야 하는 왕들이다. 베드로가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했을 때 이는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왕 같은 제사장은 세상의 악과 싸우고 또 교회 안에 침투한 비진리와 싸워야 한다. 그래야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 만일 왕이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반드시 죄를 짓게 된다. 주님은 우리더러 이기는 자가 되라고 계속해서 싸울 문제를 가져다주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우리 앞에 문제가 끝이 없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다.
참치라는 물고기는 끊임없이 헤엄을 쳐야만 살 수 있다고 한다. 참치는 아가미 근육이 없어서 입으로 물을 빨아들여야 숨을 쉴 수 있다. 만일 참치가 헤엄치기를 멈추면 질식해 죽는다. 물고기와 비교해서 생각한다면 성도는 모래밭에 드러누워 온갖 찌꺼기를 주워 먹는 가자미가 아니라 시속 112km로 헤엄치는 참치이다. 즉 성도는 계속해서 싸우고 계속해서 이기는 자이다.
22대 국회 당선자들의 면면을 볼 때 동성애와 차금법 문제에서 21대보다 더 힘겨운 싸움이 예상된다. 21대 국회에서 악법을 발의했던 의원 다수가 또 당선되었다. 그 외에도 또 어떤 의원이 반성경적인 악법을 발의할는지 알 수 없다. 현재 여러 움직임을 종합해 보면 22대 국회가 동성혼 합법화를 집중적으로 밀어붙일 것이 예견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우리의 싸움이 어려워진 것도 맞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침체하지 않고 살 기회를 주신 것이며 이기는 자가 될 기회를 주신 것이다. 적과 치열하게 싸우느라 죄짓거나 내분할 여유가 없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큰일 났다고 하지 말고 내가 일어나 막겠다고 하면 된다.
자, 왕 같은 제사장들이여 일어나라. 전쟁의 계절이 왔다. 싸워서 이길 기회가 주어졌다. 살아 있는 모든 성도는 잠을 자지 말고 전투에 참여하라. 그것이 사는 길이다. 그것이 이기는 자 곧 성도가 되는 길이다.
<카이로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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