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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河 에세이(5) I 나 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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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카이로스타임즈
댓글 0건 작성일 24-05-0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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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록 목사(선교사, 수필가) 

 

세상의 논리는 너를 밟고 내가 그 위에 서는 것이다.

성경의 논리는 너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서는 것이다.


인도의 성자라 일컫는 선다싱(Sadhu Sundarsingh)의 전기를 보면 이런 일화가 있다. 그가 어느 추운 겨울날 전도여행을 위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게 되었다. 그는 우연히 길동무를 만나 둘이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런데 저 앞에 어떤 사람이 추위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다. 같이 동행하던 사람은 그를 구해 주다가는 모두 죽게 된다면서 먼저 자기 길을 가버렸다. 하지만 선다싱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죽어가는 이를 들쳐 업고 힘들게 산을 넘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보니 앞에 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선다싱과 함께 왔던 길동무였다. 그는 홀로 산을 넘다가 추위에 얼어 죽은 것이다. 하지만 선다싱은 등에 업은 사람으로 인해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웃을 사랑하면 남도 살리고 나도 산다는 증거다.


이는 내가 없는 너, 너가 없는 나는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비유했다. 인간이란 본시 더불어 살아야 할 공동체임을 강조함이다. 왜냐하면 한 몸이 여러 지체로 구성된 것처럼 우리사회도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역시 진정한 자아란 나에게 작용하는 너와 너에게 작용하는 나라는 상호 관계 속에서 해석한다. 그는 인간의 사랑이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 공동체에서 우생학적 생존질서가 성공사례로 모델화 되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인간은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 “너와 내가 함께 사는(Win Win)” 농경사회의 일체적 가치가 보편화될 때 세상은 좀 더 밝고 살맛나는 터전이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의 세대는 너가 없거나 무시되는 나만의 사회가 추구되고 있다. 인간의 최고 비극은 인간끼리 서로를 압살하며 자기만의 도성을 쌓으려 하는 것이다. “쉰들러 리스트의 영화에 보면 나치 군인들이 낮에는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보내 도살하고 밤에는 연미복을 입고 와인을 마시며 춤을 추었다. 어떻게 인간이 시체더미 위에서 웃으며 무도회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천사와 악마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있다. 죄성을 띈 인간은 누구나 상황과 조건이 맞아지면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다.


나와 너! 구약에는 613개의 율법이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십계명이고 더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 없는 이웃사랑은 인본주의적 발로이고 이웃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은 거짓이다. 성경에는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이것은 순전히 아가페적 사랑이다. 인간은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 한 이 사랑을 할 수가 없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에 의존할 때 가능하다. 크리스천은 성령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오늘 성령을 따르는 우리 기독교인은 주님의 의도대로 정말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 내 몸처럼 너가 내게 소중한 존재인가?


<카이로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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