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河 에세이(9) I 천국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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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록 목사(선교사, 수필가)
만일 천국의 열쇠가 있다면 어떤 사람에게 주어질까.
주인공 치셤은 인간적 셈법으로 치면 실패한 선교사에 해당된다.
작가는 화려하고 출세지향적인 사역자를 무언중에 질타하고 있다.
소설 “천국의 열쇠(The Keys of the Kingdom)”는 베스트셀러이다. 본 작품은 종교적 배경을 깔고 있으나 뛰어난 문학성으로 인하여 불신자들에게도 많이 읽혀지고 있다. 1941년 발표된 이 책은 A. J. 크로닌(Archibald Joseph Cronin)에 의해서 쓰여졌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소설가이자 의사였다. 그는 주로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작품을 썼다. 여기 “천국의 열쇠”는 작가가 성장하던 때를 배경으로 하는 자전적 성격이 짙다. 그는 생생한 인물 묘사와 극적인 구성(Dramatic Plot), 종교적 정신에 입각한 휴머니즘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 핵심은 주인공인 “치셤과 그의 친구 밀리”라는 주교의 삶을 대조함으로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며 천국의 열쇠를 쥘 수 있는가를 독자로 하여금 판단하게 한다.
프랜치스 치셤과 안셀모 밀리는 같은 고향 친구였다. 그들은 신학교를 거쳐 신부가 된 이후에도 표면상 성직자로서 동일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삶의 궤적은 교차하는 두 수직선처럼 달랐다.
치셤은 어린나이에 고아가 되어 불우한 소년기를 거쳤다. 외모는 작고 바짝 말라 볼품이 없었다. 그는 신학생 시절부터 남들과 사뭇 다른 가치관으로 인해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치셤은 주위의 냉대 속에 간신히 신학교를 졸업하고 보좌신부로 몇 군데의 성당을 거쳤다. 이후 치셤은 좌천 격으로 중국에서도 오지인 절강성 파이탄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주인공은 선교지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했다. 페스트가 유행하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람들을 구했다. 그는 내전, 무서운 기근, 비적의 노략질 등을 견뎌냈다. 성당을 재건하고 학교를 세웠다. 모진 세월을 지나는 동안 치셤 신부는 볼품없는 한 노인으로 변했다. 남루한 옷차림, 뺨에 남은 깊은 흉터, 선교기간에 입은 골절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패배자의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다. 결국 치셤은 사역에 대한 선교부의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은퇴 명령에 따라 귀국하게 되었다. 작별하던 날 수많은 신도들이 찬송가를 합창하고 폭죽을 터뜨리며 꽃가루를 뿌렸다. 배가 서서히 부두를 떠나게 되자 선교사는 35년간 정들였던 파이탄 마을을 보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노신부의 얼굴은 어수선하게 뒤틀어지고 뺨에는 형언할 수 없는 눈물이 비 오듯 흘려 내렸다.
이에 비해 밀리는 정 반대의 인생을 살았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운 유복한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사교적인 성격으로 반장 노릇을 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신학교를 졸업했다. 밀리 신부는 주도면밀한 대인관계와 화려한 언행으로 출세의 계단을 요령 있게 밟고 올라갔다. 그는 가톨릭에서 주요한 보직을 거쳐 주교 자리까지 단 한 번의 뒷걸음질도 없이 승승장구했다. 그는 한마디로 위엄과 품위를 갖춘 성공한 신부의 표본이었다.
이 소설은 문학만이 제공할 수 있는 특유의 다면체 모습을 통해 우리들에게까지 닿아 공명을 일으키게 한다. 작가는 가톨릭 사제인 치셤을 성화된 인간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반항기 어린 소년, 열정적인 청년, 다정한 노인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때로는 미소 짓게 만들고 어떤 때는 잔잔한 감정의 파도를 타게 하며 가슴 아프게 한다. 치셤 신부는 고투의 삶 끝에서 “내 평생 단 한 번의 소원입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제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했다. 하나님은 신(神)다운 사제보다는 사람다운 사제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이다. 주인공을 통해 빙의(憑依)된 작가의 신념은 확신에 차 있다. 진정 이웃사랑 없는 신앙은 위선이라는 것이다. 조건 없는 인류애(人類愛)를 주장하고 있는 크로닌의 신앙은 박제 된 교리로 비인간화 된 사역자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주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기독교의 배타성을 간접적으로 질타한다. 인류는 국가나 인종, 종교나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대립하는 것을 지양하고 오직 참사랑과 평화 속에 화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 구원의 길도 등정(登頂)할 때처럼 여러 갈래의 길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다원주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주장은 인도주의(Humanism)적 입장에서 공감이 되나 신학적 안목으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천국의 문은 결코 인간 지식이나 선행이나 기타 어떤 노력으로 열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천국의 변증서가 아니다. 선교사의 전기도 아니다. 작가의 이상향이 담긴 소설이다. 문학의 특성이 그렇듯 본 작품은 인간이 지향해야 할 가치와 숭고함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추구하는 삶의 양태는 어떠해야 하나? 치열한 경쟁적 구조 속에서 누가 성공한 사람인가? 엄밀히 말해 목회와 선교에서 성공이란 없다. 승리가 있을 뿐이다. 무엇을 이루었느냐 보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천국의 열쇠는 전능자의 소관이지만 그래도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그 대상은 누구일까? 아무래도 지위, 품격, 권세, 영화(榮華)를 대표하는 안셀모 밀리 주교 보다 청빈, 섬김, 겸손, 소박한 모습으로 이웃을 지고지순(至高至純)하게 사랑한 프랜치스 치셤 신부가 아닐까 싶다. 사도 바울의 선교여정이 그러했다.
<카이로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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