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崗산책(3) I 애견(愛犬)과의 별리(別離) I 신석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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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환목사
*주인공 니모 등장
우리 집에는 16년 5개월 전, 시추 종류의 갓 낳은 강아지가 애완견으로 등장했다. 그 아이 이름을 “니모”로 정했다. 오래전 “니모를 찾아서”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었는데 그 주인공 이름을 차용했다.
<니모>
그러나 나는 원래 개 기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개를 기르면 필요 이상으로 매달려야 하고, 병이라도 나면 병원에 가야 되고 사람도 보험 때문에 문제가 많은데 개가 아프면 아야 소리도 못하고 병원비를 지불해야하니 그런 우선순위도 싫었다. 또 개가 있으면 없을 때보다 집 안이 지저분하고, 어쩌다 가게 되는 여행 시에는 개가 큰 장애물이다. 애완견(愛玩犬)이라는 이름이 그럴듯하지만 개의 존재는 결단코 애완견이 아닐 수도 있다. 비슷한 호칭으로 “애물”(碍物)이 적당할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개를 기르기로 동의한 까닭은 순전히 아내 때문이었다. 아내가 개를 기르겠다고 주장한 것은 개로부터 위안을 받겠다는 이유다. 오랜 세월, 목회자 아내로서의 결론은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거룩한 목사님”은 내 아내의 태도에 불같이 화를 내시면서 사모의 “믿음 약함”을 지적하고 어디 위로 받을 데가 없어 “...새끼”한테 위로를 받겠다는 거냐, 비난하기를 마지않을지 모르겠다.
*목사의 아내가 강아지를 택한 이유
목사의 아내라는 자리는 무엇인가. 아닌 말로 말이 좋아 “사모님”이지 사모는 목사가 받았다는 소명보다 더 큰 소명의식이 없어서는 견디기 힘든 자리요 위치다. 그것을 목사인 남편이나 교인들이 간과하고 있다. 어떤 목사는 교인들 앞에서는 순한 양이요 집에 와서는 폭군으로 변해 아내 두드려 패기를 일삼는다는 소문도 있고 사모님들의 70%-80%가 우울증 환자라는 슬픈 통계도 있다. 어떤 교인은 “사모님”이라는 호칭조차 자존심이 상하는지 그저 “사모”라고 개 부르듯 불러대기도 하지만 정말 사모는 목사인 남편과 교인들 틈에서 동네북에 다름 아닌 경우가 태반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모의 대접은 통상 “작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니 오해가 없기 바란다. “우리교회는 그런 일없습니다.”라고 호언한다면 그런 교회는 작은 교회를 벗어난 “큰 교회”에 속한 교회임에 분명하니 이 글을 읽지 않아도 좋다.
더욱 사모는 남들은 은혜 받는다는 주일날은 가일층 인내를 요구받는 날이다. 교인이 데리고 온 아이들 돌보랴, 친교 준비하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예배 한 번 제대로 드리지도 못하고 남편의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은혜를 넘치게 받은 사람처럼 위선을 떠는 날이 주일이다.
허무한 일은 갓 난 아기 때부터 똥오줌 기저귀를 갈아 채우며 교인들의 아기들을 돌봐줬는데도 그 아기가 혼자 걸을 만하면 그 아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엄마 아빠는 더 좋은 교회 더 큰 교회로 훌쩍 가버리는 일도 다반사다.
작은 교회일수록 교인들은 사소한 일에 시험도 잘 든다. 자기 사정이 있어 교회를 떠나면서도 교회 사이즈가 크니 적니, 은혜가 있니 없니, 애들 교육을 위해서 가니 오니, 온갖 핑계를 대며 잘도 떠난다.
* 떠나지 않을 사랑을 기리며
일주일 내 자식을 끼고 사는 자기 집 가정교육이나 일주일에 닷새를 가야하는 학교 교육은 아무래도 괜찮고 주일날 하루, 그것도 한 두 시간 교회에 와서 받는 교육이 아이들 인생에 그렇게 중요한 건지 예전엔 정말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돌보고 사랑을 베푼 교회를 하루아침에 버리고 떠나는 부모의 작태는 애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건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목사의 아내는 그 엄마나 아빠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를 떠날 때마다 가슴에 멍이 든다. 상처와 슬픔을 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찾아온 교인이 고맙기도 하지만 그들의 아이들을 성심껏 사랑했던 결과가 너무나 허무하기 때문이다. 하여, 골백번 다짐한다. “이제는 애들에게 정을 주지 않으리.” 그러나 다시 찾아온 애들을 품에 안으며 그 부모들에게 말한다. “애들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예배드리세요”
하지만 이런 한탄의 행간(行間)을 읽어야 한다. 목사나 사모가 느끼는 배신감은 아이들의 배신이 아니다. 어른들의 배신이다. 어른들의 배신으로 할 수 없이 배신을 따라가는 아이들의 슬픈 뒷모습이다.
가룟 유다나 브루투스나 신숙주 같은 인간은 역사 속에서나 겨우 발견하는 줄 알았던 인간 유형이었는데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뉴욕만 해도 부지기수요 지천임을 깨닫는다. 세상에서 그렇게 등을 돌렸다면 아마 멱살잡이를 해도 몇 번을 했을 인간들이지만, 그래도 교회 안에서 돌아다니는 사랑 이해 관용 오래 참음 같은 단어들이 아직은 효력이 있어 참고 또 참으며 제발 천국에서는 다른 층(層)에 살게 되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이 같은 현상 속에서 웃기는 아이러니 하나는 다른 교회에서 등을 돌리고 우리교회로 오는 교인들을 보면 그래도 반가워 함박웃음으로 대하게 되니 이런 이율배반은 어찌할 건가. 그러면서 새로 등록한 교인 등을 두드리며 말한다. “이젠 방황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 순간, 떠난 교인을 생각하며 가슴이 시려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
하여 아내는 일단 인간에게 거는 기대를 나보다 일찍 포기한 모양이다. 예수만 믿으면 의리 없이 인생을 살아도 되는가 물으면서 말이다. 그런 몰염치한 인간이 정말 믿음을 소유하긴 한 것인지 알고 싶다는 것이다. 목사의 아내가 갖는 인간을 향한 상실감, 그것은 어쩌면 아직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일지 모른다.
*드디어 나타난 위로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목회로 영일이 없던 그 시절, 그 무렵, 교인들의 애들을 업고 안고 끼고 다니다가 다친 척추와 어깨의 고통을 호소하던 아내가 늦가을 어느 날 강아지 한 마리를 기르기로 결정했다. 개가 갖고 있는 온갖 약점들을 무시하고 개가 소유한 무조건적인 사랑 하나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우리 집에 온 강아지는 생후 2개월 만에 자기를 길러줄 주인과 만났다. 곧바로 이름은 니모(Nemo)라고 지었고 니모의 세계는 우리 집 거실과 안방이 되었다. 그리고 곧 자기 나름대로 서열이 정해졌다. 제일 사랑하는 대상은 엄마인 아내였고 그다음이 누나인 딸이었으며, 세 번째인 아빠나 네 번째인 형은 열외였다. 우리는 곧 발견했다. 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확실히 사랑하는 것, 그 기본적인 사랑의 자세를 굳게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한번은 니모가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왔다. 겨우 태어난 지 5개월 때였다. 마침 엄마가 외출을 했으므로 아빠 옆에서 아픈 몸을 뉘이고 힘들어하고 있을 때였다.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들지 못한 채 그 작은 아이는 끙끙 앓고 있었다. 그 때 엄마가 돌아왔다. 순간 니모는 말릴 새도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문 앞으로 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비칠거리며 문 앞으로 가서 사랑하는 엄마를 마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이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랑이었고 충성이었다. 아내는 강아지를 죽을 때까지 성심껏 기를 것을 다짐했고 강아지 자신도 이렇게 사는 것이 자기 삶이거니 여기며 살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인간과 개의 가치를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그 비중을 설(說)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어찌 개와 비교하느냐, 공분(公憤)에 지나친 나머지 신목사를 입으로나마 난타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제위께서는 이미 제 글의 의도를 잘 아시리라 믿는다. 더러는 개만도 못한 화를 내시며 스스로 건강을 해치시는 분이 있을까 싶어 주의를 환기시켜드린다.
*니모도 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함께 살던 니모가 16년 6개월을 살고 세상을 떠났다. 우리 부부의 목회 후반, 영욕이 짙게 드리워졌던 지난 16년을 같이 살다가 너무나 안타깝게 헤어졌다. 아내의 소원대로 니모는 변절도 배신도 없이 오직 사랑하는 식구로 가족으로 살았다. 니모는 크게 바라는 것도 없었고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마셨다. 정 입맛이 없으면 고개를 돌릴 뿐이다. 이것 달라, 저것 달라, 요구도 없었다. 겨울에 입히면 입고 여름에 벗기면 벗었다.
교회에 갈 때면 아내가 “아멘 하고 올게” 인사하고 니모는 그런 우리를 조용히 응시하며 배웅했고 집에 돌아올 때면 거의 자기 자리에서 문 안쪽으로 위치를 옮겨 대기하고 있다가 한 발작이라도 엄마 아빠를 먼저 맞이했다.
니모의 결정판은 2년 전부터 병고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노화현상에 심장병이 주조를 이뤄 아마 사람 같으면 온 집안을 들었다 놨다할 상태였지만 니모는 전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다. 우리가 알아서 병원에 데리고 가고 기본적인 치료를 집에서 아내가 전담했다. 약 6개월 전부터는 음식도 유동식으로 바꾸고 약도 갈아서 물처럼 넘겨줬다. 니모는 늙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몸에 병이 깊이든 것이다. 16년 이상 가족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었던 니모는 이미 치아도 성한 게 없었고 시력도 태반을 잃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질병을 니모는 그저 감수할 뿐이었다. 그렇게 참을성이 있는 생명을 보지 못했다. 연약한 인간들처럼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따르느냐 항변하지도 않았다. 호소도 없고 울지도 않았다. 자기가 하던 행동의 패턴을 유지하노라 애를 쓸 뿐이었다. 그 힘든 와중에서도 엄마와 아빠를 보는 시선에서 사랑을 제하지 않았고 아침저녁 함께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가자는 아빠의 기세에 단 한 번도 토를 달지 않았다. “아빠 나 지금 많이 아파요 나중에 나가면 안 될까요?” 칭얼거리지도 않았다. 엄마가 약을 먹이려고 의자에 앉혀도 싫은 내색은 있었으나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엄마의 사랑임을 느끼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은 어떤가. 조건부 사랑, 조건부 충성, 조건부 순종이 태반이 아닌가. 그러다가도 자세한 설명이나 해명을 듣지도 말하지도 않고 손바닥 뒤집듯 뒤집고 떠나는 게 소위 말하는 “만물의 영장”이다. 강아지는 더러 귀찮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사랑이나 충성이 어떤 조건하에 이뤄지는 것 자체를 모른다.
*에필로그
누가 개를 더럽다고 하는가. 니모는 대소변은 꼭 밖에 나가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나갈 수 없을 때는 거실에 펴둔 자기 패드에서 볼 일을 보았다. 세상을 떠나는 날 까지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 죽을힘을 다했고, 힘들게 마지막 밤을 보내던 새벽, 그 때만은 어쩔 수 없이 자기 혼자 힘든 몸을 이끌고 부엌 바닥으로 걸어가서 거기서 눈을 감았다. 지금도 그때 홀로 병마와 죽음과 사투를 벌렸을 강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다행히 엄마 아빠는 우리 니모가 마지막 가는 길을 보고 안아주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 누가 개를 비난할 건가. 형편없는 말종(末種)같은 사람을 일러 “...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지만 개가 만약 그 욕의 뜻을 안다면 모멸감을 느낄지 모른다. 짐승이기에 더러는 짐승 같은 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인간의 부박(浮薄)함과 용렬함을 강아지에 비견하는 경솔함을 자제하기 바란다.
사랑했던 애완견 니모와 별리의 아픔을 겪으며 정말 사람보다 나은 면이 많은 강아지였구나, 라는 소회가 있었기에 몇 자 적었다.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는 인간은 무엇인가. 아니 생명을 부여받고 사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 그렇다고 이 시간 무슨 원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미물보다는 한수 위인 인생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과 강아지 니모도 그냥 왔다가 그저 떠난 존재가 아니라 목사 내외에게 커다란 사랑과 깊은 위로를 주고 간 의미 있는 삶의 족적이며 하나님의 선물이었음을 산책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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