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구원의 하나님” (6)영국에서 복음 전도자로 중보기도자로 인도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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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애 목사(강남임마누엘교회 담임)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절제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
한국에 와서 갈 데가 없었다. 한국에서 얼마 안 되는 돈은 알게 모르게 중국 선교지에서 거의 다 지출했다. 꽉 쥐고 있던 손을 펼 수밖에 없는 구제 아닌 구제헌금은 중국신학생들에게 돌아갔다. 한국에 들어와 간신히 신학교에서 함께 강의하던 동기 교수님댁에서 2달 정도 지낼 수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생활하는 건 서로 너무나도 불편했다. 두 딸은 한마디 불평도 없이 잘 따라줘서 그나마 지낼 수 있었다. 어느 날 아는 집사님께서 연락이 왔다. 순복음교회에서 청년부 사역자를 구한다는 것이다. 전에 남편이 순복음교회에서 사역을 하였기에 반가웠다. 나는 영혼구원에 집중할 수 있는 사역지와 두 아이들이 함께 거처할 사택을 위해 기도했다.
새로 건축한 4층 건물 교회는 아름다웠다. 그동안 지칠 대로 지친 중국선교환경에 비하면 호텔이고 너무나 깨끗했다. 불과 4년 남짓 중국 사역이 한국에 와서는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담임목사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청년부사역과 기거할 수 있는 사택이 있는 기도한 대로였다. 그렇지만 교회를 건축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였다. 유치부, 초등부, 중고등부, 청년부, 장년부 사역자를 두기에 어려운 교회였다. 주일과 주중예배 때이면 지하대성전에서 위층 성전까지 뛰어 다녔다. 사역이 끝나고 방에 들어와 누워있으면 발바닥에 불이 났다.
사택은 옥탑방이었다. 사례비는 옥탑방이 전부였다. 겨울이면 난방이 안 돼 일인용 전기장판에 두 딸과 함께 전기장판에 발만 올려놓고 밤새 떨면서 잠을 자기도 힘들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성인이 된 두 딸에게 미안한 마음에 할 말이 없다. 이렇게 영국선교를 잊고 정신없이 교회사역으로 또 생활비가 없어 시간이 나는 대로 영어 개인지도로 분주했다. 중국에서 영국으로 가라는 주님의 음성은 잊은 지 오래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은 잘사는데 기독교 국가인데... 라는 나의 깊은 마음에 판단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2년이 다가올 무렵 새벽기도 시간에 주님께서 영국에 선교사로 갈 것을 종용하였다. 나는 차마 주님의 메시지를 피할 수 없어 마지못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형편도 그렇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주님 그럼 제가 영국에 한번 가보겠습니다. 1달 비행기 값과 경비와 상황을 인도해주세요.” 놀라운 것은 짧은 시간에 영어 개인 지도하는 가운데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순종했다. 그리고 또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영국에 가서 할 일이 없으면 그냥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나는 영국에 들어가기까지 밤마다 특별기도를 하였다. 마지막 날 성전에서 새벽 4시에 한참 엎드려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누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큰 키에 노란 머리에 입술을 빨간 색으로 진하게 칠한 백인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꿈이었다, 성전은 불빛 없는 깊은 밤 시간이었다. 내 등에 식은땀이 났다.
나는 몇 시간 후면 영국비행기를 타야하는데 순간 영국 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주님이 가라하시니 이런 사단의 역사는 내게 그 순간뿐이었다. 나는 영국비행기에 올라 런던에 도착했다. 내 눈에 비친 런던은 중국과는 완전 반대였고 한국과도 언뜻 봐도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오랜 전통이 집집마다 흘러나오고 평화로워 보였다. 관광지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뭘 하라고... 주님 여기 잘먹고 잘사는데요, 여기서 복음 전하면 이들이 오히려 저보고 너나 잘 믿으라고 할거 같은데요.”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나를 인도하신 목사님 사모님은 영국에서 선교사로 10년 넘게 사역하고 계셨다. 한국에서 영문학과 교수로 주님께서 뜻하신바 런던에서 사역하시는 신실한 분들이었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중국 사역에 비하면 영국에서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은 육신의 눈으로 보기엔 단순해보였다. 선교사님 내외분은 나를 친절하게 안내해 주셨다. 영국교회는 겉으로 보기엔 화려했다. 나는 교민교회를 두 세군데 순회했다. 그러나 나는 영국에 와서 선교해야할 이유를 확인하지 못한 채 한달 계획했던 것을 접고 2주일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주님, 그냥 한국에서 복음 전하는 게 좋겠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청년부사역에 집중하면서 영국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사역이 바쁘면 바쁠수록 주님은 나에게 영국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를 시키셨다. 나는 형식적으로 사라가 아이를 잉태할거라는 주님의 음성에 속으로 웃었듯이 나도 기도하면서 웃었다. 훗날 영국선교를 하면서 알았다. 겉으로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이라는 것을.... 이런 나에게 어느 날 인도해주셨던 사모님이 꿈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손을 흔들면서 “선교사님, 영국으로 빨리 돌아오세요. 목사님은 멀리 심방 가셨고 교회는 텅텅 비었어요.” 영국의 영적 현실이라는 것을 훗날 영국에서 사역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영국은 기독교발생지이며 오랜 전통의 축은 하나님 교회 중심이었다. 그러나 세속의 문명과 문화를 이기지 못했다. 절대 신정주의가 아니라 세월이 갈수록 교회 안에 인본주의 지성주의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사라진지 오래다. 영국에 가서 더욱 놀란 것은 북한 탈북자들이 곳곳에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작은 사역에 탈북한 형제자매가 늘 동행했으니 말이다,
나는 영국에서 낮에는 전도자로, 밤에는 노숙자사역자로, 가끔 기사를 쓰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2012년 하계 런던올림픽은 잊을 수 없는 해이다. 세계 각국에서 온 선수들과 사람들이 북적이는 황금어장 광장과 올림픽경기장 주변에서 하루 종일 발이 부르터져라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전도하러 다녔다. 이후에 패럴올림픽 때 북한 단장을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님께서 주셨다. 이때 나는 북한 올림픽 단장을 취재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취재 후 기숙사에 들어와 한참을 주님께 우리나라의 상황 남북분단의 아픔을 기도하며 울었다. 이때 쓴 시가 “한반도의 꿈”이다.
한반도의 꿈
높고 장엄한 산허리를 휘감아 차가운 동해 바다에 누웠다.
어서 일어나 한라에서 백두까지 가자꾸나
한반도 허리를 질끈 동여맨 녹슨 철사 줄을 풀어 헤쳐
지상에서 천국까지 날아오를 수 있도록
DMZ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 소리
가난한 노래를 멈추고
사무친 그리움이 한 조각 구름으로 사라지지 않게 기도하는 이 시간
언제인가 무작정 자유를 찾아 떠나버린 허기진 사연들
밤하늘 촘촘히 박힌 별빛 사연들로 달래볼까
늦춰진 시간 속 두고 온 산천초목은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아
애타는 남은 불씨
어젯밤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나선 길
이내 광야에 홀로선 나를 알아 채리고
고였던 눈두렁 봇물이 터져 버렸네
삼천리 금수강산 황금 들녘에 넘실대는 하늘의 풍요로움이 펼쳐진 은총의 계절
알곡은 곳간에 쭉정이는 내다버리고
젖 뗀 아기가 잠든 우주공간에
아 분단의 아픔 훌훌 벗어버리고 저 만주 벌판까지
황홀한 길 너와 나 우리 시대의 부름이 아니던가
나의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그 옛날 웨일즈 후미진 시골에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들어오다가 1866년 8월 31일 대동강변에서 마지막 순교시간에도 웃으면서 성경책을 조선 땅에 던지면서 예수를 외쳤던 순교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 펨부르크의 외딴 시골교회 첫 번째 기도제목이 남북 DMZ 통일문제이고 북한 인권과 식량 기도는 내 영혼에 망치로 얻어맞는 순간이었다. 영국 작은 교회 성도 한사람은 일당백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도 그나마 영국교회가 유지하는 건 이들의 주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고 있는 실천신학의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선교 내내 우리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생각했다. 나는 그때부터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우리나라 통일문제 북한 인권과 기아문제 기도를 지금도 변함없이 기도하고 있다. 후에 한국에서 교회 개척 목적 중에 제일 우선 기도 1순위 중에 하나이다.
또 다른 면도 있다. 1834~1892년 설교의 황태자로 불렸던 팔스 스펄전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엘러펀트 카슬에 위치한 타버나클처치, 영국이 나은 세계 최고 극작가 윌리엄 세익스피어가 다녔다던 교회는 영국 사람들이 아닌 이방인들의 공간이 되었다, 감리교 창시자 웨슬레가 설교했던 웨일즈에 기타 교회들은 불교 불상을 파는 가게로 전락하고 있었다. 런던거리마다 넘쳐나는 무슬림 이슬람 사람들과 그리고 사원들, 어느 날 공사하는가 싶으면 모습을 드러나는 이교도 사원들, 어찌됐든 나는 여기저기 사역에 너무 바빴다. 때로 추운 겨울엔 풍토병처럼 나를 괴롭히는 붓는 병 때문에도 힘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없는 것 같은 사회,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천국과 지옥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가난한 영혼들이 넘쳐나는 이 땅.
“주여 이 땅을 고쳐주소서, 다시 복음의 불길이 이 땅을 새롭게 복음으로 회복시켜주옵소서.” 히드로 공항에서 떠날 때까지 간절한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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