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의를 얻어야(창 15:6) I 강신용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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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용목사(뉴욕사랑의 동산교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지금까지 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연구를 해왔고, 복음에 대해 새로운 학설을 내어놓기도 했지만, 복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살피고 연구하여 얻어지는 어떤 이론이나 학문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주시는 계시의 산물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계시해주신 복음을 믿어야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옳은 일 한 사람을 의로운 사람, 즉 의인이라 부른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을 의인(義人), 혹은 의사(義士)라고 부른다.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그러나 그것은 세상 나라의 기준이지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의인이란 원죄가 없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므로 자범죄가 없는 사람을 말한다. 이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신 사람은 인류 역사상 한 명도 없다(롬 3:10).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죄인들이기 때문에 누구도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음을 로마서 3장 23절은 이렇게 말한다.“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은 지극히 의롭고 거룩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그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고, 그분 곁에 가까이 갈 수도 없다. 의가 있어야 한다. 의가 있어야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에게는 죄만 있을뿐 의가 없으므로 구원의 길 자체가 차단되어 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으려면 다른 사람의 의라도 차용해야 한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완전한 의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칭의(稱義)를 얻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로마서 1장 17절 상반부에서는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다는 놀라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하나님의 아들이 만민의 죄를 속량하셨기 때문에 그를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런데 이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로 '나타나다'라는 단어는‘아포칼립테타이’라고 하는데‘감추어졌던 것이 드러난다’라는 뜻이며, 시제가 현재형인 것은‘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계속적으로 계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구절이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 복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다는 이 놀라운 구절은 로마서의 핵심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푸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마틴 루터'도 이 구절을 가지고 고민하며 씨름하다가 마침내 이해를 하게 되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 구절의 깨달음이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의 선봉장이 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성경 전체에서 로마서 1장 17절은 복음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 할 수 있는데,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러므로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의롭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 는 그러한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의 속성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복음이 단순히 하나님의 거룩성이나 공의성에 대한 계시에 불과하다면 복음은 좋은 소식이기는커녕 우리에게 가장 무섭고 두려운 소식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자가 없고, 그의 공의 앞에 감히 나설 자는 없기 때문이다. 로마교의 사제로 로마서를 가르치던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을 오해하고 있었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는 말을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이 들어있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오직 빛이신 하나님, 죄를 혐오하셔서 죄에는 심판을 내리시는 지극히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죄인인 자기가 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구약성경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희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루터는 '산상수훈' 중에서 사랑에 대한 주님의 설교를 묵상하다가 그만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원수를 갚지 말라"는 말씀은 그래도 지킬 수 있다 해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이렇게 율법의 내면적인 요구까지 모두 지켜야 구원 받는다면 이 세상에 구원 받을 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한 루터는 그만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 구절을 붙들고 두려움과 괴로움에 떨었던 루터의 마음속에 하나님은 한 줄기 빛을 비추어주셨다. 이 구절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신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에 들어있는‘하나님의 의’란 그리스도가 이루신 하나님의 수준에 맞는‘의'를 말하며,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에게 그 의를 거저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루터의 얼굴을 덮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그 의를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루터의 생활은 혁명적으로 변했고, 종교개혁의 선봉장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는 말했다. "내가 율법과 복음이 별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막혀있던 벽을 허물어뜨렸다. 내가 이전에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을 미워한 것만큼 이제는 그 표현을 가장 사랑하고 위안을 주는 말씀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울의 이 표현은 정말 내게 있어선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과 같이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였고, 깨달음이었다. 땀 흘리며 기도하고, 금식하며 고행하던 수도사 마틴 루터는 이 놀라운 깨달음으로 종교개혁에 앞장섰다. 우리는 이런 선진들의 고뇌와 기도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지금 값없이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해
예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고난 받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교회당에 나오는 사람들의 사업이 잘되고, 그들이 좋은 직장을 얻고, 자식들 좋은 학교에 들어가게 해주려는 목적 때문이었단 말인가? 과연 그런가? 복음을 왜곡한 사람들의 잘못된 가르침이다. 우리나라에서는“부처님, 칠성님, 조상님.. 돈 많이 벌게 해주시고..아들을 점지해주시고..집안에 우환이 물러가게 해주시기를 비나이다..”이런 토속신앙, 무속신앙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신앙의 대상만 하나님으로 바꾸어놓고 여전히 기복신앙에 매어‘다른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마다 너무 많은 게 지금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것은 사람들의 욕심을 채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복음'의 임무는 죄인을 의롭게 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다시 한 번 요약하면, 우리가 영광스런 하나님 앞에 서려면 '의'(Righteousness)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죄만 있을 뿐 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자가 한 명도 없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원죄가 없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셔서 자범죄도 없는 유일한 의인으로 만민의 죄 값을 자기 목숨으로 대신 치르셨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것이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주님의 의를 넘겨주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으로 죄인을 의롭게 하여 구원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역할이다. 많은 교회가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복음'을 전하고 '가짜 회심'을 만들어낸다. 참된 믿음 대신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는‘믿음주의’를 심어주고 있다. '의' 에 대해서는 이해도, 관심도 없으면서 교회에 나오니까 자기는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쭉정이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의 슬픈 현실이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하나님은 구원방식을 바꾸신 적이 없다. 전적인 은혜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던 하나님이 어느 날 갑자기 율법을 주시면서 그것을 완전히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시다가, 그것 또한 여의치 않자 이번에는 아들을 보내셔서 그를 믿으면 구원하시겠다고 하시는 등 구원의 방식을 계속 변경시켜 오신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셔서 구원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니까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구원의 원리는 단 하나 뿐이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에 관해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구원이 자기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의 공로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오실 때를 멀리서 바라보았고, 이를 믿었으며, 기뻐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8장 56절에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2 천년 후에 자기 혈통으로 오실 메시아의 속량으로 자기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알고 기뻐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창세기 15장 6절은“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했는데, 영어 번역본(뉴 킹제임스 버전)은 이해가 더 쉽다. "Abram believed in the Lord, and He accounted it to him for righteousness" 아브람의 믿음을 하나님은 의로 계산해주셨다는 뜻이다. 욥이나 모세나 다윗 등 구약의 많은 성도들 역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 믿음으로 의를 얻는 이 원리는 신. 구약이 동일하다.
믿음이란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가 나에게 공급되는 하나의 '도구'이며 '통로'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설교자의 적절한 비유를 소개한다. 태아가 모태에서 자라는 것은 성장에 필요한 자양분이 탯줄을 통해 공급되기 때문이다. 그 자양분을 그리스도의 의로, 탯줄을 믿음으로 설명하면 이해가 쉽다. 주 예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에 해당하는 자양분이 믿음에 해당하는 탯줄을 통해 공급받아야 태아가 살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태아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탯줄(믿음)이 아니라 바로 자양분(의)이다. 그러나 믿음(탯줄)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의(자양분)가 공급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양분인 의는 너무나 중요하지만, 탯줄인 믿음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탯줄을 태아가 만드는 것이 아닌 것처럼 믿음 역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래서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공로는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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