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河 에세이(19)-복(福)된 인생을 여는 여덟 문(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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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록 목사(선교사, 수필가)
인간은 누구나 복 받기를 좋아한다.
성경은 복(福)된 인생이 되기 위한 원리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 십자가의 은총 아래 살며 8복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복(福)이란 무엇인가? 한자 어원에서는 하늘이 주는 은혜로 말미암아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뜻한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과 평강을 누리며 나아가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삶이라 할 수 있다. 복에는 두 종류가 있다. 외면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이다. 전자는 유교에서 말한 “오복(五福): 장수(長壽), 부(富), 강령(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 대표적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8복(福)으로서 성경이 언급하고 있다. 팔복은 인간의 도덕적 강령이 아니다. 칼빈은 이 말씀을 “복음의 헌장(the Charter of the Gospel)”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빚어 가시는 천국 백성의 특징이다. 동시에 종말론적 약속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복된 인생이 되기 위한 비결은 무엇인가?
1. 심령이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가난이란 “프토코이(πτωχοὶ)”이다. 이는 하나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영적으로 무력하고 의존적인 상태를 뜻한다. 누군가 내면에 이런 갈망이 있다면 그 자체가 복된 것이요, 천국이 임하게 된다. 여기서 천국이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가 드러나는 자체를 말한다(G.E Radd).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마11:12)이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 은총의 영역이지만 피조 인간도 뭔가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 성령은 결코 탐욕으로 가득찬 자에게 역사하지 않는다. 우리가 심령을 비우고 주님을 의뢰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이다. 가난한 마음은 복된 인생의 시발점이다.
2. 애통하는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여기 "애통하다"는 “펜쎄오’(πενθέω)”이다. 이는 격심한 비통을 의미한다. 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 가슴을 치며 통곡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애통해야 하는가? 자신의 죄와 세상의 불의이다. 세상은 문명과 상관없이 갈수록 잔혹해지고 있다. 탐욕, 모함, 배신, 거역, 사기, 질투, 경쟁, 싸움, 패역함, 무정함(딤후3:1-5)이 관영하다. 현대인의 비극은 나병환자가 썩고 있는 자기 신체임에도 아픔을 전혀 못 느끼듯 죄악에 대해 둔감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진정 우리가 자신과 사회의 죄악을 직시하며 애통할 때 그 자체가 복된 행위요, 하늘의 위로가 임할 것이다.
3. 온유한 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온유란 “프라에이스(πραεῖς )”이다. 그 뜻은 사나운 짐승이 훈련으로 길들여져서 다루기 쉬운 짐승이 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따뜻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로서 어떤 경우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비유를 들자면 구겨진 종이는 구긴 상태로 계속 있지만, 비단 천은 아무리 구겨도 다시 펴진다. 이처럼 온유한 자는 비록 타인으로부터 비방과 멸시를 당했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용서하며 불편한 마음과 얼굴을 펴는 것이다. 세상은 강한 자가 땅을 차지하지만,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땅을 주신다고 하셨다. 이 약속은 종말론적이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의(義)란 “디카이오쉬넨(δικαιοσύνην)”이다. 그 뜻은 “의, 정의, 정직함, 올바른 상태”를 말한다. 본문에서 “의”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 기초한 전인적 올바름이다. 따라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단순히 불의한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열정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 의를 따라 살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의 갈망을 나타낸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마6:10) 바라는 존재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영적 갈급함이요, 굶주림이다. 이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서 비롯되며, 곧 영적 생명력의 증거라 할 수 있다.
5.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긍휼이란 “엘레에오(ελεεω)”라는 단어에서 왔다. 이는 자비, 인자, 인애(仁愛), 민망(憫惘), 불쌍히 여김 등의 뜻이다. 긍휼의 반대되는 말은 무자비, 잔인, 포악, 무정, 냉정(冷情), 무시이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이유는, 먼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긍휼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따라 흘려보내는 삶이다. 이로서 우리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웃을 외면하지 말고 자기 문제처럼 여기며 주님의 사랑을 행함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런 자에게 주님의 긍휼하심이 넘칠 것이다.
6. 마음이 청결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7). 청결이란 “카카로스(καθαρός)”이다. 이는 깨끗함, 순전함, 투명함, 단순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칼빈은 “마음이 청결하다 함은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 부연하면 이는 잡스러운 생각이나 세속적 욕망 등이 없는 바른 자세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때 묻지 않는 영적 진실함으로 마음을 청정하게 유지하면 자연계시와 특별계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이는 현세에서는 믿음으로, 장차는 영광 가운데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함으로 성취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이 복을 누리게 된다.
7. 화평케 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이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화평이란 “에이레네(είρήνη)”이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히브리어 샬롬(shalom)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화평은 나와 상대방이 함께 어울려 사는 아름답고 좋은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더욱 본문에서는 단순히 인간끼리의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화평은 수직적, 수평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자는 죄인 된 인간이 예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여는 길이요, 후자는 구속받은 백성이 그 은혜로 이웃과 화평을 이루는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드러내는 증거다.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10). 여기 의란 “디카이오슈네(δικαιοϭύνη)”이다. 그 의미는 “의로움, 공의, 올바름”이다. 마5:6의 “의”가 하나님의 뜻을 향한 갈망이라면, 마5:10의 “의”는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 자체다. 주의 제자 된 삶은 세상과 가치관이 다르기에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나아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다보면 박해(迫害)는 불가피하다. 이로 인해 받는 고난은 참된 믿음의 증거이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때문에 받은 불이익과 환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자체가 복된 것이며 천국 소유자만이 갖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맺음 말
팔복은 천국에서 시작하여 천국으로 끝나는 수미(首尾) 상응의 완결미를 보이고 있다. 팔복은 각 절마다 “복이 있나니(마카리오이)”란 선언으로 시작되며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역설적 내용으로 끝난다. 팔복은 인간의 도덕적 성취가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 귀결되어진 천국백성 됨의 원리와 특징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 심령의 가난, 애통, 온유, 의에 대한 갈망, 긍휼, 청결, 화평, 박해를 경험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은혜와 종말론적인 복의 선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8복에 나타난 속성을 덧입어 행복하고 아름다운 생을 살아야 한다. 오늘 여기에서 천국의 삶을 누리지 못하면 내일 저기에서도 천국의 삶을 보장받을 수 없다.
<카이로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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