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崗산책 (14) 장례식 소묘(素描) | 신석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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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이 생각 저 생각, 생각의 늪으로 빠져들 때가 많다. 오늘 저녁, 인연 있는 분이 상(喪)을 당해 장례식에 다녀왔다. 그러고 보면 봄이나 여름보다 가을이나 겨울 쪽에서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내 나이도 갈 날에 더 가까우니 죽음의 주변이 생소하지 않다. 그렇다 하여 크리스천들이 하는 상투적인 조사(弔辭)를 언급하려는 건 아니다.
저 60년대나 70년대, 그때의 서울과 가을은 지금보다 빈곤한 계절이었고 삶을 놓고 떠나가는 사람 앞에서 오열하는 슬픔도 더 짙지 않았나싶다. 1970년대 중후반, 그러니까 미국으로 오기 몇 해 전, 수유리 세일극장 뒤쪽에 살았던 한 선배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그는 같은 대학은 아니었지만, 학년도 나이도 2년 연배였고 아주 잘 생긴 미남이었다. 당시 나와는 학생시절의 연합활동으로 만난 인연이 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낭만도 아픔도 있었으나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그런 추억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진로를 결정짓지 못하고 방황할 때 그 형을 만나기 위해 그의 단칸 셋방을 찾아갔는데, 며칠 전, 어머니 장례식을 치루고 왔다고 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형은 지난날의 모든 행동, 생각, 말들을 잊고 싶다고 했다. 객기와 치기가 범벅이었던 학창시절의 흥분들을 대단한 애국이나 울분처럼 위장하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다만 조금 일찍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그토록 열심히 교회를 다녔던 어머니의 행적을 추모하고 싶다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는 청춘을 갓 넘은 때였는데 그러나 그는 당시 무슨 교회를 다니고 있지는 않았고, 더 더욱 하나님을 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의 어떤 강렬한 삶의 추구가 그의 마음 안에 일렁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랬던 그가 1년여 뒤에 죽었다. 젊은 아내와 두 살짜리 사내아이를 남겨 놓고 홀연히 지병의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글자그대로 충격이었다. 더 충실한 인생을 살고 싶었던 젊은이었는데 아주 짙어가는 가을 날 떠나 간 것이다. 그는 작은 골목이 끝나는 막다른 집에 살고 있었고 그날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 간만에 그의 집을 찾았을 때, 장의사에서 매단 조등을 보며 터지는 슬픔과 눈물을 참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지금이 그때였다면 나는 그의 인생 안에 의미 있는 한 분을 소개했을 것이지만 이미 시간은 흘러갔다. 지금이라면 그의 어머니가 만났던 분을 더 자세히 말해줬을 텐데. 추운 겨울처럼 얼어붙은 젊음의 기로에서 생의 절대자이며 그 자체였던 하나님, 그 분을 소개했을 텐데, 뒤늦은 내 무능과 무지를 탓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 것인가.

오늘 장례식이 끝나고 근처 한식집에서 갈비탕을 먹었다. 죽음을 생각하며 갈비탕이라니. 배는 고팠지만 차마 그릇을 다 비울 수는 없었다. 문득 내가 무슨 섬에 있는 건가, 고독한 순간이 엄습했다. 망망한 대양에 떠 있는 섬, 그러다가 풍랑이 일고 폭풍우가 몰아치면 그 작은 섬은 물에 잠겨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잔치 집보다 초상집에서 교훈을 얻으라고 이미 말씀하셨지만, 정말 가을은 죽음과 이별과 그리고 허무한 인생의 빈자리를 생각해야 할 계절임에 틀림없다. 초상집에서 무슨 교만을 부릴까. 막 떨어질 낙엽사이로 저만치 마주 달려오는 세월이라는 이름의 기차, 그 굉음과도 같은 기적소리를 들으라는 것이다.

오늘따라 초가을임에도 무척 추웠다. 그러나 오늘은 육신이 추운 게 아니라 영혼이 추운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유명한 목회자였던 헨리 비쳐 목사가 이런 글을 남겼다.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 무덤 저쪽 나라 시민이 여기서는 방랑자이고 이쪽의 자유인이 저쪽에서는 포로처럼 갇혀 지낸다. 또한 저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쪽에서는 가난하고 이름 없는 부평초다.” 정말 탁월한 지적이며 표현이다.
남은 인생이 얼마 아닌데도 뭔가를 걸어보려는 만용이 두렵다. 주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용맹한 사람이 아닌데도 내 안에 조금 남아있는 것을 자꾸만 꺼내려 하신다. 어차피 열차는 올 테고 그때까지는 침울하게 살지 말라는 뜻인가.
오늘 또 하나의 죽음 앞에서 올해에도 어김없이 다가올 겨울을 이겨내기를 다짐한다. 더 혹독한 봄이 기다릴지도 모르니. 다만 섬 같은 내 존재에 내리는 은혜를 기다릴 뿐이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 16절을 떠올린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카이로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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