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의존사색(32)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 정관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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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호 목사(뉴욕만나교회 원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교회는 적어도 네 가지 사명이나 직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네 가지는 첫째 예배, 둘째 교육, 셋째 성도교제, 넷째 선교입니다. 예배는 성령과 진리로 드려져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 선포로서의 설교, 찬양, 기도, 헌금 등이 주요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교육은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으로서 교회에 속해 있는 자는 누구나 다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도교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로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일을 말합니다. 선교란 국내외의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말하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역입니다.
오늘 주제는 교회의 사명 가운데 세 번째 요소인 성도교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우리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서로서로 사랑하라‘는 명령과 교훈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만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눌 수 있는데,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이웃을 우리 자신의 몸처럼 곧 우리 자신처럼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22:37-40에서 「율법」의 대강령(본 뜻)을 이렇게 요약해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본 뜻, 요체, 요약)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하는 이 이웃사랑에는 한계(limit)가 없습니다. 또한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라도 다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이 끝과 한계가 없음을 우리 주님은 누가복음 10장에 나타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인 우리의 이웃을 우리 가족에만 국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이웃을 같은 교회 다니는 교인에 국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이웃을 이웃집에 사는 친한 사람에 국한해서도 안 됩니다. 같은 민족인 한인들에게 한정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이웃은 그 모두입니다. 아니 우리의 ‘원수’까지도 우리의 이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산상설교를 통해 마태복음 5:44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원수, 우리 자신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사랑이 이토록 끝없이, 한계 없이 펼쳐 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사랑이 이토록 끝없이 나아가야 하지만, 그 이웃사랑에도 우선순위와 그 크기의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라도 사랑해야 하지만 특별히 같은 신앙을 지닌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남달리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그가 기록한 요한1서에서 형제사랑, 성도교제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게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1서 3:16 “그(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한1서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일서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사랑 가운데서도 특별히 먼저 성도들 사이에서의 「서로 사랑」,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인 것과 성령의 전(성전)임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성도의 교제, 성도의 서로 사랑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임을 확인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34-35을 다시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교훈을 다시금 되새기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 곧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랑이 곧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이요, 성도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증명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서로 사랑함이 없다면 그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4:20-21에도 이 진리가 분명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 성도의 서로 사랑, 성도의 진정한 교제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지닌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표시해 주는 표지(mark)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토록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 성도교제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아름다운 성도 교제를 이루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성도 교제를 이루어 나가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우리 스스로 이미 ‘하나 되었음’을 확인하고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가 되라’가 아니라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3에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가장 중요한 진리는 우리가 이미 성령으로 ‘하나 되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우리 자신과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곧 내 생각과 견해, 내 일하는 방식과 행동, 내가 살아가는 습관, 내가 배운 교회의 전통과 생활 등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될 때라도 우리는 그 ‘서로 다름’이 우리의 ‘서로 같음’ ‘서로 하나 됨’의 본질과 그 교제를 깰 수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르고 서로 힘들어 하는 부분이 있어도 우리는 끝까지 생명이 다하기까지, 아니 영원까지 함께 나아가야 할 그리스도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성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하나 됨: 하나 되었음」의 사실을 계속 확인해 나가는 과정 없이는 성도 교제를 지속해 나갈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이 연합(unity,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 모두, 우리 각자가 힘써야 합니다. 이 연합을 유지하는 일은 그냥 두어서 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힘써 지켜야 합니다.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어떤 노력입니까? 에베소서 4:2을 보면 우리가 노력해야 할 일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겸손, 온유, 인내, 사랑, 용납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목사인 저 역시 제게 하는 주변 사람들의 스쳐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이와 반대로 혹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제가 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섭섭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야고보서 1:19에서 “…사람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정말 특히 말하기를 좋아하거나 말을 많이 하는 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는 속히 하지만 말하기는 아주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팝송 가사에 ‘Think twice before you answer"란 가사가 있습니다. 대답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하란 말입니다. 여러분, 일언삼사(一言三思)라는 말도 있습니다. 한 번 말하기 위해 세 번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잠언 12:16에는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어도 슬기로운 자는 수욕(치욕)을 참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 25:11에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셋째, 진정한 성도 교제를 이루기 위해서 성도인 우리 사이에는 서로 사과하는 일(용서를 비는 일)과 용납하는 일(용서를 해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저는 같은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도 서로 인사도 잘 안 하고 서로 대화도 잘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아왔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 이유와 사정과 배경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코드(code)가 맞지 않아서 코드(chord)를 이룰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자그마한 한 사건을 통해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해 버린 후 아예 상종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잘잘못은 가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느니라”라는 베드로전서 4:8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교제는 아주 가까운 사람끼리만 있는, 있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성도교제는 교회 내에 있는 그 누구라도 함께 가져야 하는 일입니다. 어느 다른 교회들의 경우 교회 성도의 수가 갑자기 많아지거나 또는 다른 교회와 합병하거나 다른 교회 교인들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성도 교제에 분파가 생겨 가까운 사람들만 서로 끼리끼리 따로 노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서 만나는 사람도 「끼리끼리」, 교회 내 식사할 때도 「끼리끼리」할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는 지금도 앞으로도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교회 내에 절친한 교우가 있더라도 너무 티(?) 내지 말고 교회 내에서는 그런 친한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더 가까이 가서 이야기도 하고 안부도 묻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는 그런 아름다운 성도교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새 교우가 적응하는 기간이 적어도 3-6개월 걸립니다. 그동안 잘 배려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잘 적응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힘써 도와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사안이 민감한 정치문제, 사회문제, 지방색 등의 토론으로 서로의 교제가 파괴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서로의 견해를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명령을 따라 서로서로 사랑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온 세상에 알리고,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곧 삶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힘써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카이로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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