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河 에세이(23)-문명 지상주의를 고발한 “빠빠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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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록(선교사, 시인, 칼럼니스트)
빠빠라기(Pāpalagi)는 “하늘을 찢고 내려온 사람”이란 뜻이다.
이는 사모아어로서 소위 문명인이란 자부하는 백인을 가리킨다.
작가는 추장 투이아비라는 가상인물을 통해 서구문명을 질타한다.
“큰 소리로 떠들지 말라.
너의 말은 부서지는 파도의 소리다.
야자나무 잎이 바람에 스쳐서 와삭와삭하는 소리다.
네 얼굴이 기쁨과 굳셈으로 넘치지 않는 한
네 눈이 반짝이지 않는 한
그리고 네게서 하나님의 모습이 태양처럼 비쳐오지 않는 한
너의 지껄임을 이제 필요가 없다.”
(남태평양 사모아 제도의 추장이 선교사에게 던진 말)
『빠빠라기』의 저자는 에리히 쇼이어만(Erich Seheurmann)이다. 이 책은 사모아 추장의 기록처럼 읽힌다. 그러나 투이아비(Tuiavii)는 실존인물이 아니다. 문명을 비추기 위한 문학적 가면이다. 저자는 서구문명과 동시에 그 바깥의 삶을 경험한 증인이었다. 두 세계의 간극이 질문을 낳았다. 진보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가? 풍요는 영혼을 살찌우는가? 기술은 삶을 구원하는가? 작가는 이 질문을 이론으로 풀지 않았다. 외부자의 시선을 빌렸다. 이 책은 비난이 아니다. 자기 고발이다. 문명의 실패를 말하지만, 근원은 인간이다. 문제는 구조가 아니라 욕망이다. 문명은 그 욕망이 형상화된 결과다. 그래서 『빠빠라기』는 낡지 않는다. 질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투이아비 눈에 비친 서구 사회
추장의 눈에 비친 서구문명은 경이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낯설고 기이하며, 어딘가 불안한 풍경이었다. 자연 속에서 살아온 그의 눈에 도시는 거대했으나 생기가 없었다. 사람들은 건물과 기계 사이를 분주히 오갔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으나, 얼굴에는 여유 대신 초조함이 있었다. 시계는 사람을 재촉했고, 시스템은 쉼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거기에 매여 허둥대고 있었다. 저들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했으나, 정작 자기 삶을 붙들고 있지 못했다. 풍요 속에서 허기졌고, 연결 속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추장의 표현은 투박하고 천진했다. 자연인의 눈에 비친 문명은 우스꽝스러웠다. 돈은 그저 “둥근 쇠붙이”였고, 신문은 “종이 무더기”에 불과했다. 그 단순한 명명 속에서 문명의 허상이 벗겨졌다. 그는 현대인을 부러워하기보다 오히려 염려했다. 추장의 말은 정곡을 찌르며 문명에 길들여진 우리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2. “빠빠라기”의 고발
『빠빠라기』의 비판은 문명 자체를 향하지 않는다. 초점은 문명을 통해 증폭된 인간의 내면이다. 문제의 근원은 기술도 제도도 아니다. 심령이다. 문명은 죄를 가려 주는 세련된 외피다. 외피를 바꾼다고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새로워져야 할 대상은 인간이다. 이 고발은 문명 밖의 외침이 아니다. 서구문명 내부에서 나온 성찰이다. 저자 에리히 쇼이어만은 발전의 그늘을 정면으로 보았다. 기술은 비약했다. 편리함은 증식했다. 도시는 팽창했다. 소유는 축적되었다. 돈이 가치를 결정했다. 촘촘한 일정 속에 움직임은 분주해졌다. 시간은 분절되어 관리되었고 쉼은 밀려났다. 속도는 능력이 되었고 느림은 실패가 되었다. 가속될수록 마음 한켠 공허함이 자리했다. 정보는 범람했으나 생각은 얕아졌다. 사람은 수치로 환원되었다. 가치는 성과로 측정되었다. 연결은 늘었고 친밀은 줄었다. “더 많이, 더 빠르게”는 하나님 없는 삶의 공식이 되었다. 풍요는 확장되었으나 충만은 오지 않았다. 그가 던진 물음은 단순하다. 무엇을 위해 이토록 분주한가? 왜 소유가 존재를 대신했는가? 어째서 관계는 얕아졌는가? 이는 수사가 아니다. 문명 한복판에서 복음을 붙든 선교사의 절규다. 결론은 분명하다. 문명을 폐기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형상의 회복이다. 인간이 새로워질 때 문명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3. 신앙적 진단
문명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기술은 삶을 편리하게 만들지만 죄를 제거하지는 못하고, 제도는 질서를 세우지만 마음을 새롭게 하지는 못한다. 문제는 문명이 아니다. 문명을 다루는 인간이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의 통찰처럼 죄는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욕망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돈도 우상이 되고 속도도 우상이 되며 지식도 우상이 된다. 심지어 선해 보이는 제도조차 궁극의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우상이 된다. 인간은 스스로를 고칠 수 있다고 믿으며 더 나은 방법과 더 정교한 시스템을 찾지만, 성경은 다른 진단을 내린다. 필요한 것은 개선이 아니라 새로 남이며, 수정이 아니라 탄생이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는 인간의 무능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며 동시에 사랑에 대한 최종 답변이다. 그러므로 신앙적 진단은 분명하다. 그것은 문명(Civilization)을 신봉하지 말고 인간이 창조의 원형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맺음 말
결국 『빠빠라기』가 겨눈 곳은 문명이 아니다. 인간이다. 무엇을 믿고 어디에 기대어 사는가? 의 문제다. 투이아비의 직설적 표현은 조롱이 아니라 거울로서 우리 얼굴을 비춘다. 인간이 아무리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편하게 산다 할지라도 기쁨이 말라 있다면 이미 길을 잃은 것이다. 복음은 소리로 증명되지 않고 얼굴빛과 생활에서 능력으로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을 말하면서 주님을 닮지 않는다면 그 말은 부서지는 파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많은 담론이 아니라 더 깊은 변화이다. 삶의 질보다 심령의 회복이 우선이다. 그 변화는 십자가 아래서 자아가 무너질 때 비로소 새 길이 열린다. 그러면 창조주, 인간, 만물이 3차원의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문명도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데 제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카이로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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