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河 에세이(25)-삼인삼색(三人三色)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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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록(선교사, 시인, 칼럼니스트)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죽여버려라(오다 노부나가)
울게 만들어라(도요토미 히데요시)
울 때까지 기다려라(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늘 우리는 속도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기술은 앞서가고 선택은 많아졌으나 방향은 흐릿하다. 이럴 때 역사는 거울이 된다. 일본 전국시대의 세 인물,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혼란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질서를 세웠다. 파괴로 길을 연 자, 조정으로 확장한 자, 기다림으로 완성한 자가 있었다. 이 대비는 단순한 성격차이가 아니다. 상황을 읽는 방식의 차이다. 세 인물의 통치방식은 정답이 아니라 기준을 제공한다. 우리는 저들의 리더십을 참고삼아 현재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 지금 삶의 현장은 어떠한가? 우리 앞에 놓인 두견새(과제)는 무엇이며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는가?
1.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는 오와리국(尾張國)의 다이묘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친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 사후 가문 내 분열과 외부압박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렸을 적 기행으로 “오와리의 바보”라 불렸으나 이는 낡은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기습 격파했다. 일약 중심세력으로 부상했다. 이어 미노국(美濃國)을 평정했다.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옹립해 교토(京都)에 입성했다. 1573년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폐하고 중앙 권력 재편을 단행했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철포 전술로 승리했다. 세력은 급속히 확장되었다. 그러나 1582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에서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반란을 맞았다. 48세로 생을 마쳤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웠으나 시대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버려라.” 그의 통치리더십은 강력한 결단력과 카리스마를 상징한다. 그는 파괴와 창조를 동시에 밀어붙인 급진적 통치를 하였다. 그는 혈통과 문벌중심 질서를 해체하고 능력과 공로를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했다. 오케하자마의 기습 승리로 주도권을 잡았고, 나가시노에서는 조총을 집단 운용해 전쟁의 공식을 바꾸었다. 내정에서는 악좌(樂座) 악시(樂市) 정책으로 상업을 해방하고 유통을 정비해 경제활력을 끌어올렸다. 아즈치 성(安土城)을 중심으로 권력의 상징과 행정 거점을 결합했다. 불교 세력, 특히 엔랴쿠지(延暦寺)와 같은 기존권위에도 과감히 개입하며 정치권력을 일원화했다. 그의 통치는 신속하고 단호했으며, 저항에는 가혹했으나 유능한 자에게는 신분의 벽을 낮췄다. 그는 시대에 적응한 인물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설계한 선도자였다.
2.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는 오와리국(尾張國)에서 하급 병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기에는 떠돌며 생존을 배웠다. 10대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이 되었다. 군수와 축성 능력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묵묵한 실무로 신임을 얻었다. 1582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직후 신속히 군을 돌렸다.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를 격파했다. 이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경쟁 세력을 제압했다. 1585년 관백(関白)에 올랐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로 전국통일을 완성했다. 이후 국내질서를 정비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국력이 소모되었다. 1598년 교토 후시미(伏見)에서 61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생애는 미천한 출발을 넘어 권력의 정점에 오른 기록이었다.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들어라.” 그의 통치 리더십은 기발한 재치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략을 상징 한다. 상황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온갖 꾀와 전략을 동원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주도적인 태도이다. 그는 무력보다 설득과 회유를 통해 사람을 움직였다. 적을 완전히 제거하기보다 복속시켜 체제 안으로 흡수했다. 전쟁에서도 외교와 심리를 결합해 최소 충돌로 최대 성과를 이끌었다. 전국 통일과정에서 토지조사(太閤検地)와 병농 분리정책을 시행하여 사회 질서를 재편하고 중앙권력을 강화했다. 신분 질서를 고정하면서도 능력 있는 인재를 발탁해 조직의 효율을 높였다. 그는 감정을 읽고 흐름을 다루는 데 능했다. 강압과 유연성을 상황에 맞게 조절했다. 히데요시는 질서를 연결하고 완성으로 이끈 자였다.
3.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3–1616)는 1543년 미카와(三河) 오카자키(岡崎)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인질로 떠돌며 생존과 정치 감각을 익혔다.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 이후 세력을 정비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협력하며 기반을 다졌다.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에도 성급히 움직이지 않고 힘을 보존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하면서도 에도(江戸)로 이동해 독자적 기반을 구축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の戦い) 전투에서 승리하며 권력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1603년 쇼군(将軍)에 올라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고 통치를 시작했다. 1615년 오사카 전투(大坂の陣)에서 도요토미 세력을 제거해 통일을 완성했다. 1616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그의 생애는 인내와 축적이 결국 시대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려라.” 그의 통치 리더십은 인내와 끈기를 상징한다. 그는 목표를 향해 인위적 무리수를 두기보다 자연적 때를 기다렸다. 이를 위해 성급한 돌파를 경계하고 흐름을 읽으며 힘을 축적했다. 불리한 국면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기회를 엿보았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는 이러한 준비가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승리 이후 그는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어 권력을 제도화하고 다이묘(영주)를 통제하는 구조를 완성했다. 무력보다 법과 질서를 앞세워 장기 안정 기반을 구축했다. 이처럼 이에야스는 감정보다 계산을, 단기 성과보다 지속을 택했다. 그는 결코 변화를 서두르지 않았으며 때가 무르익으면 단번에 결실로 전환했다.
맺음말
일본은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말까지 천황과 쇼군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고, 지방의 영주(다이묘)들이 각축하던 전쟁의 시대였다. 질서는 붕괴되었고 힘이 곧 법이었다. 이 혼란 속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무력과 혁신으로 낡은 체제를 해체하며 통일의 문을 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기반 위에서 세력을 통합하고 행정질서를 정비해 하나의 국가로 묶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결실을 가져가 260년 평화의 에도 막부를 열었다. 그 통치스타일은 두견새 비유로 나온다. 여기 언급된 두견새는 일본 전통 시가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내야 하는 새”의 대명사로서 당연히 돌파해야 할 일(과제)을 상징한다. 결과적으로 노부나가는 판을 짜고, 히데요시는 완성했으며, 이에야스는 그것을 유지·관리했다는 것이다. 이 세 종류의 리더십은 고정된 성향이 아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적절히 응용할 수 있는 방편이다. 그 핵심은 속도보다 분별의 문제다. 따라서 우리도 조급함을 덜고 긴 안목 가운데 현장에 맞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때가 되면 무르익으리라!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약1:5).
PS: 참고문헌
오타 규이치의 “信長公記”, 다이니혼사료(大日本史料), 태합기, 徳川実紀, 徳川家康
<카이로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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