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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중심에 서신 빛” I 노재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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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카이로스타임즈
댓글 0건 작성일 26-04-08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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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화 목사(전 성결대 학장, 사회학/목회학 박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 그리고 오늘의 삶(갈4:4, 요1:14, 고전15:20을 중심으로)

 

우선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은 가장 깊은 밤에 찾아온 빛이다.

 

겨울의 가장 깊은 밤은 단순히 어두운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빛이 오기 직전 존재가 스스로 물으며 빛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와 같은 밤이 있다. 방향을 잃고, 의미를 잃고,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모르는 시간.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무엇을 향해 하고 있는가 말이다. 인류의 역사 즉, 문명은 발전했고, 지식은 축적되었으며, 철학은 인간을 설명하려 했지만 정작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지 못한 채 역시 그러한 어둠 속을 지나고 있었다. 더더욱 죄와 죽음, 불안과 두려움이 인간 존재를 덮고 있던 시대. 그때,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시고 빛을 보내셨다. 그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둘째, 시간을 가르는 사건이다.


그 어두운 그때에 역사를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쟁도, 혁명도, 제국의 탄생도 아닌 한 아기의 탄생이었다. 인류는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시간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시간을 나눈다. Before Christ, Anno Domini. 이것은 단순한 연대의 구분이 아니다. 존재의 방향이 바뀐 사건이다.


갈라디아서 4장 4절 말씀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기서 ‘때’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결코 늦지 않는다. 우리 인생의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 때는 크로노스(chronos)가 아니고 카이로스(kairos)로서 의미가 충만한 순간,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된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 속으로 들어온 바로 이 순간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세계 질서를 설명하는 데에 궁극적인 원리를 로고스(logos)라 하며 이성, 질서, 법칙이 모든것을 설명하려했지만 히브리 전통은 하나님을 만나는 존재로 이해했다.

 

셋째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은혜다.


여기서 하나님은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쭉 만나지는 존재였다가 결코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비밀이다. 이 선언은 철학의 완성이요, 로고스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고, 이성은 인격을 입었고, 영원은 시간속으로 들어 왔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사랑의 사건이다. 하나님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증거이다. 고통의 자리로, 눈물의 자리로, 인간의 연약함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시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직접 인간의 삶을 살아보셨기 때문이다.

 

넷째로 어둠을 밝히는 빛이다.


성경은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해질 수 없는 존재이다. 알면서도 넘어지고, 결심하면서도 실패하는 존재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빛 그 존재는 설명되지 못했지만, 그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인간은 오랫동안 빛을 향해 손을 뻗어왔으나 종교는 빛을 찾는 시도요, 철학은 그 빛을 이해하는 노력이었다. 더구나 인간은 부분적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아무리 어두워도 그리스도의 빛이 임하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난다. 빛은 싸우지 않는다. 그저 비출 뿐이다. 마태복음 4장 16절 말씀에 보면,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빛이 임하면 어둠은 물러간다.

 

다섯째로 십자가는 사랑의 절정이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지만 그 빛은 영광의 자리에서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로 낮은 자리로 향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사랑이 만나는 자리였다. 인간은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 죽음을 통해 우리를 살리셨다. 그래서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며, 사랑의 승리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말이 아니라 십자가로 증명되었고, 구원의 문을 여셨다.

 

여섯째, 부활과 새로운 시작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신 사흘째 되는 날,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즉, 부활은 존재의 정의가 바뀐 사건이며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죽음은 끝이 아니고, 그래서 절망은 결론이 아니다.


부활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오늘 인간은 더 이상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향해 열려있는 존재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문이 되었고 무너진 마음이 다시 일어설 때, 깨어진 관계가 회복될 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선택할 때, 그것이 바로 삶의 부활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는 미래형이 아닌 현재형이다.

 

일곱째로 디아스포라의 삶 속에서 우리는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민자의 삶은 언제나 경계위에 있다. 두 문화와 두 언어 사이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의 정체성은 환경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이다.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것이 우리의 중심신앙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초청이 바로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억지로 들어오지 않으시고, 사랑은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을 여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오늘 그 문을 여시겠는가?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십자가, 부활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계속되는 이야기이다. 빛은 이미 왔다. 부활의 계절, 존재의 봄이 오면 죽는 듯 보이지만, 씨앗은 사라지지 않고 봄을 기다리며 자연의 언어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노라고... 생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이다.


존재의 중심에서 존재의 의미가 새롭게 정의되는 순간에 그 분 안에서 시간은 목적을 얻고, 삶의 방향을 얻으며, 죽음은 의미를 잃는다. 그리고 우리는 빛으로 오신 그 분의 은혜를 기억하며 부활의 생명으로 절망의 자리에서 빛을 선택하는 믿음으로 승리하자고....


<카이로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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