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崗산책 (4) 존경에 대하여 /신석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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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환 목사
*오늘 산책의 타이틀을 “존경”이라 했다.
많이 쓰는 말이지만 사실은 그리 쉬운 말도 아니다. 때문에 산책하며 건네는 말쯤으로 이해하기 바란다.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초등학교에 도지사가 방문했다.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도지사를 환영하고 그분의 강연을 듣는 시간이 되었다. 그때 식장으로 들어가기 전, 교장선생님이 도지사에게 아주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탁했다. “도지사님, 정말 어려운 부탁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교육상 꼭 이 청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교장인 제가 제일 훌륭한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야말로 교육의 첫 출발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강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시작하시기 전에 반드시 저에게 인사를 해 주십시오.” 도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시간이 되어 맑은 눈을 반짝이며 학생들이 강당에 모였다. 도지사가 연설을 하기 위해 나오면서 교장선생님 앞으로 먼저 갔다. 그리고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모여 있던 학생들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즐거운 웃음들을 머금고 정말 우리 교장선생님은 훌륭하신 분이구나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참으로 구태의연한 옛날 얘기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다시 꺼내 들어야할 메시지가 이 안에 있다.

그런 뜻으로 본다면 이 시대는 지도자가 실종되었고 존경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시대일 것이다. 사랑으로 보듬어 안고 이끌며 따르는 관계들이 희미해졌다. 영어로 존경은 Respect란 단어인데 그 의미는 박수를 쳐준다는 뜻이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높여준다는 뜻이다.
*그 존경과 리스펙트의 으뜸은 아마 부모와 자식 간에 이뤄지는 관계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하는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데 비해 자식이 생각하는 부모의 서열은 항상 “자기 새끼” 다음이다. 그러므로 자식이 부모에게 사랑을 미끼로 미리 유산을 물려달라며 감언이설로 충동해도 절대로 그 말에 넘어가면 안 된다. 단 돈 만 불이라도 넘겨주면 그날로 자식은 줄행랑을 선택한다. 최후의 일각까지 “지갑”을 지키라는 경고를 무시하지 말라. 어떤 노부부는 평생 장만한 집과 쌈짓돈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노인아파트로 들어가 자식의 효도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노인부부는 정말 가난한 부부로 여생을 살아가야했다니 자업자득이다.

*이 시대의 가장 큰 관계 파괴중 하나가 스승과 제자이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고리타분한 얘기는 차한(此限)에 부재(不在)한다 하여도 한국의 사제지간, 그 아름다움은 이미 붕괴하고 말았다. 한국의 현실을 보자. 너도 나도 한국 교육계에 등장한 전교조 이후 스승을 향한 존경심이 퇴보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각종 드라마와 예능에서도 선생과 제자를 시정 상인 질서보다도 못하게 만드는가 하면 선생님을 구타하고 희롱하는 일도 다반사가 되었다. 웃기는 얘기 중 하나가 선생님을 부르는 호칭도 언제부턴가 “쌤”이 되어버렸다. 학생들이 선생을 보고 쌤 쌤 해서 그 선생이름이 쌤인 줄 알았다. 해괴한 현상 중 하나이다. 존경심도 리스펙트도 사라지고 학교가 아닌 부자 일타강사가 주름잡는 학원만 성행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존경의 한쪽 보루인 “목사님”은 어떤가.
목사 자신이 스스로 목사의 위상을 낮춰버린 감도 없지는 않다. 인터넷을 켜고 유튜브를 열면 목사들의 설교가 홍수처럼 범람하니 가슴과 가슴이 닿는 은혜로운 설교를 찾기란 그야말로 연목구어(緣木求魚)가 되어버렸다. 설교야말로 찍어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인터넷을 도구로 하는 설교영상을 금지하는 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때는 꼭 순복음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조용기목사님을 향한 존경이 넘쳐났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미안한 말이지만 고인이신 그분을 향해 “님”자는커녕 이름만 부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옥한흠목사님이 가시고 난 후 “사랑의 교회”는 그들만의 리그로 멈춰버린 느낌이고, 명성교회를 위시한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끼쳤던 사회적 영향력은 핑계하기 좋은 펜데믹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하여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라면 머리를 흔들면서, 이 지구상에 있는 교회는 가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의 인간성이 차라리 교인들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고치지 않는 분이 허다하다. 속히 면모가 일신되어 차라리 고전적 교회로 돌아갔으면 한다.

*한 가지 첨부하자면 목사들 간에도 존경심이 흘렀으면 좋겠다.
아마 세상의 모든 관계에서 목사와 목사의 관계처럼 건조한 것도 없다. 하여 목사는 미안하지만 친구가 없다. 그래도 자주 만나는 A목사 B목사가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지인이지 친구는 아니다. 내가 속을 안주는 것처럼 그 역시 몇 겹의 옷을 껴입고 있으니 무슨 수로 친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목사가 열 명이면 신학교는 열한 개쯤 되니 특별히 무슨 학교 동문에서 보는 유대감도 희박한데다가 희한하게도 목사들의 관념 속에는 “너나 나나 같은 목사”라는 인식이 고정관념으로 박혀있어 대강 위아래도 없는 게 목사 사회다.
나이는 어려도 교회가 중형정도 되면 목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아무리 날고 기어도 교회가 변변찮으면 목사 역시 변변찮은 목사로 취급받기 일쑤다. 그러니 겸손은 자칫 강대상에서만 외쳐지는 단어일 뿐이고 어쩌면 목사와 가장 친한 말은 교만일지 모른다. 그러다보니 목사들의 이합집산이나 사적모임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각종 선거철이 되면 횡행하는 모략중상, 치열한 선거운동은 정상배수준을 넘나든다.

존경받는 목사님, 사랑하는 부모님, 아끼는 선생님 동료 선후배가 건재하는 사회가 도래하기를 소망한다. 더불어 존경은 반드시 위 사람만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랫사람도 존경할만하면 그렇게 대우해야 마땅하다.
이런 경구가 있다. “신은 모든 인간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신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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