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절에 나눈 대화 I 나성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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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균 목사(샬롯한인장로교회 원로)
미국에서 제 2의 인생을 원로목사로 마치고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조국에서 추석절을 맞이하였다. 공교롭게도 추석 때를 맞추어 조국을 다시 방문한 것이다. 우리민족은 추석절에 무슨 이야기를 주로 나누게 되는가? 금년에도 지도력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을 것이다. 여야는 민심을 잡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으나, 정치지도자들, 경제지도자들에 대해서 많은 실망들을 토로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특히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아쉬움은 절망을 넘어 탄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왜일까?
화합과 상생에서 실패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오랜 전통 속에서 흑백논리에 너무 익숙하여 있다. 도무지 중간 단계가 다 생략된 채, 누구라도 나의 아군이 아니면 다 적군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이론이 마음껏 펼쳐지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인데도 어떻게 흑백논리 그것이 아직도 가능한 생각인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당황하였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 우리 보수 신학을 공부하고 웨스트민스터 신대원을 비롯한 미국 보수신학교에 유학하여 계속 공부하던 학생들은 누구라도 한번쯤 당황하게 된다. 그것은 한국인만 아니고 일본인도 중국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동양 유교문화권에서 온 학생들은 우리 스승들에 대한 거의 절대적인 인정과 존경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에게 신화적인 존재로 가르쳐주시던 분들 예를 들어 박형룡, 박윤선 박사 같은 분들은 은사요, 한국 신학의 표준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감히 비판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텀 페이퍼(학기논문)를 쓰게 되면 의례히, ‘이래서 훌륭하고 저래서 위대하고, 자유주의 신학이 도전하던 그 어려운 시절을 기적같이 잘 승리로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하시던 모든 것이 옳고 귀감이 됩니다’ 라고 은사들에 대하여 쓰기 마련이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쓰기만 하면 어김없이 F를 맞고 탈락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이 미국 교수들도 그 때 은사들의 그 시절 한국에서 자유주의 신학과의 투쟁도 다 잘 알고 그때 돌아가던 한국의 신학형편을 잘 알텐데, 이해하고 동의하기보다는 그런 말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박형룡 박윤선 박사들도 사람이요, 피조물인데, 어떻게 잘못이 없을 수가 있느냐? 정확히 중립적인 입장에서 반드시 장점과 단점을 확실히 밝혀내라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 네가 공부하고 신학적인 훈련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냐는 이론이다.
동북아 문화권에서 온 학생들이라면 누구라도 갈등을 겪고, 적응하기 힘들어 하기 마련이다. 미국교수들의 지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따르는 데는 최소한 1년 반이나 2년은 족히 소요되는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점차 미국의 문화, 즉 아무도 완벽할 수 없고 누구라도 다 틀릴 수는 없다. 누구에게라도 장점이 있고, 또 단점이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다는 가르침을 진지하게 수용하고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익숙해지니, 배우는 내가 얼마나 폭이 넓어지고 객관적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동시에 그 때 배우며 간절히 바랐던 것은 미국 여러 곳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가서 한국사회를 지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언젠가는 우리도 서양 사람들처럼 더 객관적이 되고, 더 폭이 넓어질 것이라는 기대이었다.
그 구체적인 한 예가 있다. 보수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칼빈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이고, 박형룡 박사께서도 그분과 함께 도립(넘어지고 일어섬)을 같이 한다고 공언하였던 루이스 벌코프 교수가 신정통주의자요 신신학의 거두로 많은 비판을 받은 칼 바르트의 저서들을 누구보다도 많이 인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큰 흐름의 흑백논리 사고가 아직도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아닌 듯 싶다.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머지않은 장래에 반드시 고쳐지고, 반드시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벌써 젊은 세대는 이렇게 점점 객관화 되어가고 있으며, 중립적이며, 감정이나 나에게 이롭고 해로운 유무와 관계없이 그들의 가치관을 잘 함양하고 표현하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꽉 막힌 보수나 꽉 막힌 진보주의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열린 보수, 열린 진보가 좀 더 객관적으로 대화도 하고 상호 수용도 비판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열망하여 본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이 더 진실하고 더 포용적이며, 더 설득적이기 때문이다.
이점에 있어서 성경에 귀한 모범이 나온다. 다니엘의 예이다. 다니엘 1장에서 보여주는 대로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 왕족과 귀족의 후손들 가운데서 민첩하고 똑똑하며, 학문성이 있는 잘 생긴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주어 3년을 잘 훈련시킨 후, 왕 앞에 모셔 궁전 자문관으로 서게 하려는 계획을 피하는데, 얼마나 지혜롭게 화해하고 상생하는지 만고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면서, 우상 앞에 바쳐진 왕의 진미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감독관에게 제안을 하는데, 채식을 주어 열흘간만 시험하여 달라고 한다. 얼마나 지혜롭게 상생하는 방법인가?
열흘 정도의 시험은 3년에 비하여 너무나 짧기 때문에 얼마든지 해 볼 수 있는 것이요, 그렇게 제안을 할 때에도 틀림없이 많은 기도와 지혜로 하였겠지만 확실한 각오와 결단 때문에 강직하고 타협이 없는 것만을 보이지 않고 지극히 예의 있고 합리적이며, 겸손하고 설득력 있게 감독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의 긍휼을 간구하는 태도로 승리를 거둔 것이며 만고의 모범이 아닐 수가 없다. 어느 한 구석에도 바벨론 지도자들을 무시하거나 거스르게 하지 않은 다니엘과 세 친구를 볼 때 우리가 우리의 결단과 신앙적 지조를 지키는 지혜를 많이 배우게 된다.
화해와 상생, 그것은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크리스천 덕목이요, 우리가 앞장서서 하루라도 빨리 이 민족을 그렇게 발전시키어 지구촌 최대의 지도 국가를 만들어 세계를 더욱더 잘 섬기는 미래를 낳아야 하겠다. 그것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며,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여 보고 화해하며 상생하는 지극히 작은 실천에서 확실하게 시작이 되는 것이다. 화해와 상생의 명수 우리 예수님을 다시 본받기 위하여 우리 모두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자!!
<카이로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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