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河 에세이(29)-영혼의 기상도인 일기(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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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록(선교사, 시인, 칼럼니스트)
기록되지 않는 삶은 사라지나 일기는 영원히 살아 숨쉰다.
일기는 마음을 정돈케 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성찰의 거울이다.
일기는 그 내용에 따라 문학성 및 사료(史料)로서 가치가 크다.
현대인은 기록의 홍수 속에 산다. 사진을 찍고 영상을 남기며 SNS에 하루의 흔적을 올린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내면세계는 기록하지 않는다.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는 남아 있는데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사라진다. 어디를 다녀왔는지는 기억하면서 왜 웃었고 왜 울었는지는 잊는다. 삶의 풍경은 남는데 삶의 의미는 지워진다.
일기란 무엇인가? 지나간 시간을 붙잡는 글이요, 흩어진 마음을 정돈하는 거울이다. 이 장르는 남을 의식하지 않는 자기 영혼과의 가장 정직한 대화의 장이다. 일기는 하루를 되돌아보게 하며 삶을 깊게 한다. 오늘의 작은 기록이 내일의 지혜가 되고, 한 사람의 일기가 훗날 한 시대의 증언이 되기도 한다. 일기를 써야 하지 않을까?
1.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난중일기
“우수사(右水使)가 오지 않아 홀로 제장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발진하여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 우수사가 와서 합류하였다. 적이 정박한 곳을 물었더니 사천(泗川) 선창에 있다 하여 곧바로 그곳에 이르렀는데 왜인들은 이미 상륙하여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었고 산 아래에 전선을 줄지어 대놓았다. 거전(拒戰)이 매우 완강했는데, 나는 제장들을 지휘하여 일시에 돌진하게 하였다. 화살을 비처럼 쏘아 댔고 각양의 총통을 쏘아 대니 그 대란이 폭풍 우레와 같았다. 적의 무리는 두려워하며 달아났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인지 부지기수였다. 왜인의 수급을 많이 베었고 적선 십 삼척을 불살랐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을 맞았다. 나 역시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아 등까지 관통했으나 중상에 이르진 않았다”(1592년 5월 29일, 맑음).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전란 중에 쓴 일기”라는 뜻으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임진왜란 7년(1591-1598) 동안 쓴 것이다. 이는 현재까지도 초 고본 8권 중 7권이 남아서 충남 현충사에 비치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1962년에 대한민국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인간의 생사가 달린 전장 터에서 거의 매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 난중일기는 우리민족에게 보배로운 유산이 아닐 수 없다.
2. 안네 프랑크(Anne Frank)의 일기
“밖에서는 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 죽음 같은 고요함이 곳곳에 뒤덮여 있어. 그만 깊은 땅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만 같아. 날개가 부러진 채 캄캄한 밤에 혼자 둥지를 지키며 노래를 부르는 새 같은 심정이지. 어른들은 도대체 왜 전쟁을 일으킬까요? 어른들은 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까요?”(1943).
안네 프랑크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1942년 7월부터 1944년 8월까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좁은 은신처에서 숨어 지냈다. 그녀는 13살이 되던 생일 날 붉은 체크무늬의 일기장을 선물로 받았다. 안네는 일기장에 “키티(Kitty)”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2년 동안 비밀 장소에 숨어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키티”에게 낱낱이 고백했다. 자유를 갈구하던 그녀는 1944년 8월 4일 밤 밀고를 받은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유대인 학살지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안네는 1945년 3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불과 몇달 전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안네의 일기”는 가족 중 유일하게 생존한 부친 오토 프랑크에 의해 출간되고 나서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3.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의 일기
"길고 길었던 뭍과 바다에서의 여행은 끝나고, 힘써 일할 사역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이르렀다. 여호와의 눈이 나를 살피고 계심을 느낀다. 그가 나의 모든 여정을 인도하셨고, 나를 위하여 할 일을 선택해 주셨으며 모든 걱정과 염려를 맡아 주셨다. 이제 그가 나를 행하며 견딜 수 있게 도와주실 것이다. 어찌 내가 행복하지 않겠는가?”(1890년 10월 13일).
이상은 한국에서 2대에 걸쳐 77년 동안 의료선교사로 헌신한 홀 선교사 가족 중 가장 먼저 한국에서 사역을 시작한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의 육필일기의 일부분이다. 이 일기에는 100년 전 로제타 선교사가 펼쳤던 구체적인 선교 내용뿐 아니라 함께 일했던 선교사들의 모습과 한국 여성들이 서양 의사의 치료와 복음을 받아들이는 과정 등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당시 로제타 선교사는 일기를 단순히 글자로만 채운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진과 편지, 실물 자료 등을 첨부했다.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평가되고 있다.
4. 일기의 특성과 유익한 점
일기는 하루 일과 중 개인적인 느낌이나 사고의 추이에 따라 기록하는 자유로운 산문이다. 이는 글쓴이의 주관적인 진술이 위주가 되므로 대개는 자전적인 기록의 성격을 띠게 된다. 결코 남에게 보이거나 출판하려는 의도 없이 쓴 것이기에 그만큼 진솔한 표현이 이루어진다. 그 형식은 시나 소설처럼 어떠한 제약이나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일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통문학양식으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일기는 의도적 변개(變改)가 가해지지 않는 기록으로서 중요시되기도 한다. 일기를 쓰므로 얻어지는 유익은 무엇인가? 저마다 하루를 돌아보며 자기 성찰을 할 수 있게 한다. 감정과 생각을 글로 표현함으로써 바른 인성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된다. 매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줄여준다. 불확실한 기억을 확실하게 해준다. 어휘력과 문장력이 길러진다. 훗날 역사적 자료가 된다.
5. 좋은 일기 쓰는 법
일기는 잘 쓰려고 할수록 어려워진다. 거미가 거미줄을 뽑듯 자연스럽게 쓰면 된다. 문장에 힘을 줄 필요도, 문법과 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일 이유도 없다. 일기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거는 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하루를 처음부터 끝까지 복사하듯 옮길 필요는 없다. 수많은 일 가운데 마음에 오래 남은 하나를 골라내면 된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크기가 아니다. 그 일이 내게 무엇을 남겼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제목을 붙이고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생각과 느낌, 깨달음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 좋다. 여러 사건이 마음에 걸린다면 한데 섞지 말고 각각의 제목 아래 따로 기록하라. 초점이 선명할수록 삶의 의미도 또렷해진다. 일기는 문장의 완성보다 기록의 진실성이 먼저다. 매일 쓰면 가장 좋지만 하루를 놓쳤다고 자신을 책망할 필요도 없다.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 대로 그날의 마음을 솔직하게 남기면 된다. 결국 좋은 일기란 잘 쓴 글이 아니라 삶을 자기 언어로 기록한 언어적 자화상이다.
맺음 말
성웅(聖雄)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434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전투의 현장 감각과 도전을 주고 있다. 안네의 일기 역시 2차대전시 사망의 음침한 그늘 아래서 숨죽이며 살았던 그 아픔을 느끼게 한다. 로제타 셔우드 홀의 일기는 한민족을 향한 사명인으로서 본인의 신앙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여기 언급한 세 종류의 일기는 각각 형식과 내용이 다르다. 그러나 독자들을 긴장시키며 잔잔한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그 힘은 무엇인가? 저들은 생사의 극한 상황에서 영혼의 울림을 글로 표출했기 때문이다. 폐부에서 나온 일기는 이렇게 역사 속에서 빛을 발한다.
사람은 누구나 보이지 않는 내면의 날씨가 있다.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다. 때로는 폭풍이 몰아치고 이름 모를 안개가 마음을 덮기도 한다. 일기는 지나간 날을 붙잡는 글이면서 다가올 날을 준비하는 글이다. 어제의 나를 기록함으로써 오늘의 나를 성찰하고, 내일의 나를 새롭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기는 시간의 일지가 아니라 영혼의 기상도이다. 삶을 비추는 거울이고, 미래를 향해 남기는 조용한 유산이다.
<카이로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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